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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리와 이렇게 둘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 짝꿍이긴 하지만 장난을 많이 치는 사이도 아니었고, 쉬는 시간만 되면 나는 남자아이들과 숨바꼭질이든 술래잡기든 하러 나가버렸으니까. 왜 같이 가자고 한 거야…. 솔직한 내 생각이었다. 슬쩍 나리를 쳐다보았다. 나리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말도 없었고. 그냥 그렇게 우리 둘은 계속 걸었다.
운동장을 지나, 문방구를 지나, 계속 걸었다. 분식집이 보였다. 가게 앞을 지나려는데 맛있는 냄새가 솔솔 코를 간지럽혔다. 멈춰 서서 멍하니 어묵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옆을 흘깃 쳐다보았다. 나리도 똑같이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아주머니가 휘적이고 있는 떡볶이에 꽂혀있었다. 국자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도 함께 왔다 갔다 했다.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나리가 깜짝 놀라더니 두리번거렸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묵 먹을래? 내가 말했다. 나는 떡볶이 먹고 싶은데. 나리가 대답했다. 두 개 다 먹자. 그래, 그러자.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용돈을 받았다. 일요일에 어머니께서 천 원을 주셨는데, 어떨 때는 일주일 내내 돈을 쓰지 않은 적도 있었고, 수요일만 지나도 돈을 다 써버릴 때도 있었다. 그 주는 운이 없게도 돈을 꽤 많이 써버렸다. 내 수중에 400원 정도만 남아있었는데, 다행히 나리가 천 원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는 어묵과 떡볶이를 함께 시킬 수 있었다. 나리에게 다음 주에 내 몫을 갚겠다고 약속을 했다. 나리는 갚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했다.
둘이 함께 멍하니 분식집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묵과 떡볶이가 나왔다. 어묵은 양은 냄비에 국물과 함께 나왔고, 떡볶이는 비취색의 타원 접시에 가득 담겨 나왔다. 어묵에는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물 떡이 함께 나왔다. 어릴 적 분식집 메뉴 중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었다. 물 떡. 가래떡을 꼬챙이에 꽂아 어묵탕에 넣은 음식이다. 지금 생각하면 엄청 특별한 음식은 아니었는데도, 나는 물 떡을 참 좋아했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서야 알게 되었는데, 물 떡은 부산 경남 지방에만 있는 음식이었다. 이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맛보지 못했다니…. 그 정도로 나는 물 떡을 참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물 떡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거 먹을래? 내 물음에 그녀는 반반 먹자고 대답했다. 혼자 다 먹기에는 너무 커. 전부 양보할 생각이었던 나는 그래도 물 떡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물 떡을 덜어 내 접시로 옮겼다. 꼬치를 빼고 아주머니께 받은 가위로 떡을 반으로 잘랐다. 크기가 반으로 줄었지만, 물 떡은 여전히 맛있어 보였다. 접시에 국물을 조금 덜고 남은 떡을 옮겨 담았다. 심심해 보이지 않게 어묵 몇 개도 같이 덜어 넣었다.
어묵이 가득 담긴 접시를 받고 나리는 고맙다고 말했다. 자기는 어묵을 이렇게 많이 먹지 않는다며 내가 자기 접시에서 어묵을 덜어 먹어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녀는 어묵보다는 떡볶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떡보다는 어묵을 주로 먹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나는 떡볶이도 떡을 더 좋아했으니까. 우리는 함께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웠다. 어묵 국물과 물 떡의 조합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떡볶이 접시의 바닥 무늬가 보일 때쯤, 저 멀리서 학교 종소리가 들렸다. 곧 형, 누나들이 하교할 시간이었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곧 몰아칠 손님들을 대비하고 계셨다. 우리도 선배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남은 떡과 어묵을 서로 집어 먹고,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서기로 했다.
분식집을 나오며 나는 다시 말했다. 고마워. 내 말에 나리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다음 주에 갚는다며? 응. 그래도 고마워서. 알겠어. 우리는 다시 책가방을 둘러메고 걸었다. 나는 떡볶이를 좋아해. 나리가 불쑥 말했다. 근데 떡을 별로 안 먹었잖아. 내가 말했다. 응 난 떡볶이에 있는 어묵이 더 좋아. 나는 떡이 더 좋은데. 떡은 너무 오래 씹어야 해서 별로야. 그게 좋은 건데. 나는 별로야. 너 그럼 물 떡도 별로 안 좋아하겠네? 응. 나리는 이상한 아이였다. 어떻게 물 떡을 싫어할 수 있지.
계속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두 갈래로 뻗은 골목에서 우리는 오른쪽 길을 택해서 걸었다. 아래로 경사가 진 도로였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하교할 때면 늘 이곳을 뛰어서 지나가곤 했다.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경사가 주는 중력에 이끌려 하나둘씩 와다다 내달리곤 했다. 오늘도 역시나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 솟아올랐다. 옆을 슬쩍 쳐다봤다. 나리는 이곳에서는 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세상의 진리를 먼저 깨우친 현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리에게 이 위대한 놀이를 알려줘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마음속에서 솟구쳤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는지 나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내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여기…에서는 원래 달리기를 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내 뺨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여기서는 달려서 집에 간다고.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가 걷다 멈춘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양 볼이 불타고 있었다. 너 얼굴이 되게 빨개졌다. 나리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리와 눈이 마주친다면 내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얼굴이 빨개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스트레스, 추운 날씨, 알코올 등등. 하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안면홍조의 가장 큰 원인은 대부분 심리적 문제이다. 전문가의 말을 빌리자면, 심적 긴장의 대부분은 결국 남들과 자신의 판단이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스스로 감정 표현을 겁내게 될 때 일어난다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내가 얼굴이 빨개진 건 나리와 골목길 달리기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리는 나를 한동안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 알고 있어. 너희 남자애들 여기서 항상 뛰어다니는 거. 나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나리를 마주 보았다. 응, 그거 말한 거야. 이번에는 나리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나는 여기서 뛰어본 적 없어. 뛰면 기분이 좋아져. 진짜? 응, 해볼래? 그래. 그럼 나 따라와, 알겠지? 나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몰린 피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느꼈다. 빙빙 어지럽던 세계가 다시금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때보다 기분 좋게 발을 굴렸다.
3블록 정도 열심히 내달렸다. 옆에 평소와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더 힘차게 달음박질하게 했다. 내리막길 옆으로 늘어진 건물과 전봇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시야 뒤로 사라졌다. 호흡이 조금씩 가빠지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심장 소리는 점점 커졌다.
저 멀리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 슈퍼. 달리기를 멈춰야 할 때였다.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뒤따라오던 나리의 발소리도 내 발소리와 엇박자를 내며 조금씩 잦아들었다. 오거리에 도착했다. 우리 집은 직진을 해야 했고, 나리의 집은 ○○ 슈퍼의 맞은편 골목길로 좌회전해야 했다. 나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색색 숨을 고르며 발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 슈퍼 앞 가판대로 눈을 돌렸다. 여러 가지 불량식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논두렁, 아폴로, 맥주 사탕 등등. 유행하던 디지몬 카드 팩도 전시되어 있었다. 가판대 옆에는 철권 2 게임기가 보였다.
오락실 가봤어? 불쑥 내가 물었다. 아니. 가볼래? 나는 돌아서서 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나는 기다렸다. 잠시 후 나리가 입을 열었다. 어디 오락실? 아, □□ 오락실. ○○ 오락실은 나도 잘 안 가. 나리가 고민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동네에는 큰 오락실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 오락실이고, 다른 하나는 □□ 오락실이었다. □□ 오락실은 당시에 인기가 많았던 게임인 철권 4와 태그의 기계를 여러 대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고, 반면 ○○ 오락실은 DDR과 PUMP 기계를 여럿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 오락실은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도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 처음에는 어른들이 PUMP를 매우 좋아하나 보다 하고 말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