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일기

1-1

by 세타필

눈을 떴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샤워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했으니 패스. 머리를 말리면서 아침으로 어떤 빵을 먹을까 고민했다. 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고 외투를 덮어 입었다. 선크림을 발랐다. 거울을 보고 마른세수를 했다. 오늘 하루도 화이팅. 크루아상 두 개와 마시는 요구르트를 챙겨 집을 나섰다.


며칠 전 비가 추적추적 오더니 날씨가 갑작스레 너무 추워졌다. 두꺼운 패딩을 미리 챙겨두길 잘했지. 밖을 나서 괜히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김이 피어나지는 않았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구나. 머쓱해진 기분으로 주차장을 향했다.


너를 보내고 아무런 생각 없이 살다 보니 벌써 겨울이 왔다. 겨울이라는 계절을 생각하면 난 항상 네가 떠오른다. 이상하게 너와의 추억은 겨울이 참 많았다. 눈 내린 뒷산이라든가, 겨울 햇살 가득한 유원지, 김 서린 선술집의 창문, 그런 것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갔다. 너무 정신없이 살았던 걸지도. 자책을 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 살아내기만 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면 밀려오는 공허함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줄 몰랐으니까. 어찌 보면 이 감정은 사실 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며 호르몬이 다르게 작용하게 된 것일지도. 그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나는 원래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내 옆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나는 조금씩 바뀌었다. 함께 하는 것의 즐거움,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기쁨,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너는 떠나버렸다. 나에게 수많은 감정을 선물하고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처음에는 짐짓 오만하게 행동했다. 나는 괜찮아. 사실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관계에서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이제 알게 되었다. 이별이 주는 상처가 크지 않았던 건, 내가 그만큼의 감정을 쏟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걸.


회사에 도착했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원하는 층을 누르고 구석으로 이동했다.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중기의 문이 열렸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이미 출근한 동료들이 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당시 우리 교실은 총 4분단으로 책상이 나뉘어져 있었다. 교단을 기준으로 오른쪽부터 1분단, 2분단, 3분단, 4분단으로 호명되었고, 각 분단은 총 5열로 구성되어 있었다. 3분단 2열의 왼편 책상이 내 자리였다. 그 옆은 짝꿍의 자리였다. 우리 반은 인원이 거의 남녀 반반이었던 탓에 한 짝을 제외하면 모두가 남녀로 짝꿍을 했다.


내 짝꿍은 나리였다. 그녀와 나는 실로 역사가 깊은 관계였다. 무슨 말이냐면,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주 마주치곤 했던 사이라는 소리다. 그녀는 동네에서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를 할 때면 이상하리라고만 치 나와 같은 팀이 자주 되곤 했었다. 당시 나는 팀의 승리만을 생각하는 영락없는 미취학 아동 그 자체였기 때문에, 남자들처럼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그 아이가 나와 한 팀이 된다는 사실이 매우 싫었다. 아, 왜 계속 나리랑 같은 팀이 되냐고. 그렇게 싫은 소리를 많이 했었다. 당연히 그녀와의 사이는 좋지 못했고, 나는 그 아이를 그냥 동네에 있는 달리기 못하는 여자애로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터라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에는 같은 반이 되더니, 짝꿍까지 되었다. 아, 또 엄청나게 싸우겠네. 짝꿍이 된 첫날 든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매우 사소한 것으로도 티격태격했고, 반의 여자애들은 항상 나리 편을 들어 나에게 뭐라고 했다. 그런데 어쩌라고, 다른 사람 책상을 침범한 건 내가 아니라 걔인데.


하루는 내가 청소 당번이었을 때이다. 당번들끼리는 항상 가위바위보로 청소 담당을 정했는데, 내가 창문 닦기를 맡게 되었다. 청소 당번들 사이에서도 가장 기피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닦기 당번이었는데, 재수도 없게 내가 맡게 된 것이다.


다들 닦기 청소를 하기 싫어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닦기는 청소의 가장 마지막 순번이었기 때문에 교실 쓸기, 책걸상 옮기기 당번들보다 일을 늦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먼지가 날리고 쓸기 당번들이 교실을 아래위로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경로를 방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따라서 제일 청소가 늦게 끝나는 건 물론이고 다른 담당들이 청소하는 동안 닦기 당번은 가만히 기다려야만 했는데, 이게 참 고역이었다. 10초만 가만히 있어도 좀이 쑤시는 나이에 놀지도 못하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운도 없지. 투덜거리며 걸레를 집어 들고 화장실을 가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나리였다. 오늘 집을 같이 가자고 했다. 나리의 집에 가는 길은 사실 우리 집 가는 길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방향도 같은 데다 나리 집에서 10분 정도만 더 걸으면 우리 집이 나오니까. 하지만 나는 오늘 청소 당번인걸. 혹시 얘가 이 사실을 잊어버렸나 해서 친절히 오른손에 쥔 걸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 오늘 청소 당번인데? 나리는 괜찮다고 했다.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래, 그럼 그래라. 알겠다고 대답한 후 걸레를 빨러 갔다. 전 당번이 제대로 해놓지를 않았는지 걸레를 짤 때마다 검은 물이 엄청나게 나왔다. 대충 물기를 털어내고 교실로 돌아왔다.


우리 교실은 3층에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절대로 선반 위에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다. 혹시나 장난을 치다 창밖으로 떨어질까 걱정하셨던 것이다. 청소할 때도 손이 안 닿는 곳은 굳이 청소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에게 의자보다 높은 받침은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책상을 두고 올라가 닦으려 하거나, 선반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으면 혼내겠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물론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청소 담당 중 제일 귀찮은 일을 하는데 마지막에 조금의 보상은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다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 키보다 큰 창문을 앞에 두고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기분이 참 좋아졌거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


복도 창문, 창가 창문, 교실과 복도를 나누는 창틀과 문까지 싹싹 닦았다. 아, 다했다. 뿌듯한 마음에 턱을 높이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소 당번이었던 여자애들 몇몇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나리가 보였다. 진짜 안 가고 있었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분침은 시간이 종례 후 족히 30분은 지났음을 알려 주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또 전에 싸운 일로 화풀이를 하려 하는 걸까?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청소가 끝난 교실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한 녀석이 우리 모두에게 자신에게 집중해 주기를 요구했다. 모두 떠드는 걸 멈추었다. 그는 청소가 끝났다는 것을 교무실에 알리자고 했다. 나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 함께 가위바위보를 했다. 몇 번의 환호와 짜증 섞인 외침 뒤 당첨자가 정해졌다. 심부름꾼은 잠시 투덜거리더니 교무실로 달려갔다.


선생님은 오시지 않았다. 바쁜 일이 있으니 오늘은 너희를 믿고 보내주겠다 하셨다. 모두 앗싸! 소리를 지르고는 썰물 빠지듯 교실에서 사라졌다. 나도 기분 좋게 가방을 둘러메고 교실을 나서려는데, 그 순간 교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걸레가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걸레를 안 빨았구나. 친구들과 장난을 친다고 깜빡했던 것이다. 걸레는 빨고 가야지. 가방을 내려놓고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오늘은 내가 꼴찌로 집에 가겠네. 물기를 짜면서 생각했다. 살짝 짜증이 났다. 돌아와 교실 문을 열었다. 나리가 아직 교실에 있었다.


아직 안 갔어? 내가 물었다. 같이 가자고 했잖아. 익숙한 짜증 섞인 말투가 들려왔다. 아, 그래. 걸레를 교실 뒤 선반에 널어두고 가방을 둘러멨다. 난 그냥 이 시간까지 기다릴 줄은 몰랐지. 말을 내뱉고 고갤 들어 교실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종례하고 40분은 지났는데…. 속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 나리와 눈이 마주쳤다. 0.1초나 지났을까, 우리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목적 없이 여자애와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되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리도 비슷한 생각인 거 같았다. 이제 가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응. 내가 대답했다. 나리는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나에게로 걸어왔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리의 뒷모습이 말을 했다. 빨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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