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일기

2-7

by 세타필

내가 희망 없는 생각을 반복하며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 다행히 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어릴 때 여기 와봤어.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진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고장이 난 채로 얼어버리기 직전에 나리가 말을 이었다. 응, 부모님이랑 같이 왔었는데, 재미있었어. 그때랑 똑같은 거 같아, 여기는. 나도 어릴 때 부모님이랑 같이 왔었어. 내가 말했다. 나는 동생이 있으니까, 녀석이랑 같이 넷이서 온 거지. 맞아, 너 동생이 있었어. 남동생 맞지? 응, 맞아. 잘 지내? 동네에서 몇 번 봤던 거 같은데. 잘은 지내는데, 말을 더럽게 안 들어. 그래? 나리가 웃으며 말했다. 너도 근데 부모님 말씀 잘 안 듣잖아. 어, 어떻게 알았어? 어릴 때부터 그랬어, 너는. 그랬나? 응. 아주머니께서 혼내는 걸 몇 번은 본 거 같은데? 아닐걸. 혼낸 게 아니고, 조언을 하신 거지. 이렇게 행동하는 게 더 좋지 않겠니. 뭐 이런 거. 그걸 혼난다고 하지 않아? 음…. 그런 거 같기도 하네.


이쪽으로 가는 거지? 앞에서 유리고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말했다. 아, 응. 맞아. 나리가 유리에게 뛰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유리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좋아졌다. 놀랍게도 나는 나리와 대화를 이어 나가는 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괜히 으쓱해져, 내 옆의 호열이의 등을 괜히 툭 하고 쳤다. 왜 그래? 아니, 날이 좋잖아. 좋기는 무슨, 바람만 겁나 부는구먼. 쟤들 기다린다. 빨리 가자. 약간 울적해 보이는 호열이를 격려하며 나는 빠르게 걸었다.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흔들다리는 재미있었다. 다리는 정말로 흔들거렸다. 목숨에 위협을 느낄 만큼은 아니었지만, 재미는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수원지 산책을 마치고 오늘의 메인 이벤트인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햇살이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조금 걸어가니 저 멀리 놀이기구의 모습들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롤러코스터가 휘어진 레일을 타고 우리의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꺄아아.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바람을 타고 귀로 흘러들어왔다.


일요일 정오의 놀이공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비록 조금 오래된 놀이공원이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짝을 지어 범퍼카, 바이킹, 회전하는 컵, 롤러코스터를 탔다. 짝은 물론 여자 둘, 남자 둘이었다. 나나 호열이에겐 지금에 와서 짝을 바꾸자고 이야기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대개 여자아이들이 우리보다 앞 좌석에 탑승했는데, 롤러코스터나 바이킹같이 무서운 놀이기구를 탈 때 그녀들이 내뿜는 비명과 손동작은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범퍼카는, 뒤에서 나리의 차에 꽈당 충돌하는 게 참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순회공연 하듯 정신 없이 놀이기구를 즐겼다. 어느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입장 전 분식을 먹기는 했지만, 우리는 십 대 소년 소녀들이었다. 넘치는 에너지만큼 우리는 많은 양의 식사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배고픔을 나만 느낀 건 아닌 듯 했다. 나의 배고프지 않아? 라는 말에 호열이는 번개처럼 화답했다. 죽을 것 같아. 유리도 허기가 졌는지 밥을 먹자는 의견에 찬성했다. 그녀는 나리를 쳐다보았다. 너는 어때? 라는 말에 나리는 매우 밝게 나도 배고파. 라고 말했다.


아까 분식집에서 나리의 실망한 표정이 문득 생각났다. 분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된 건가? 아니, 그럴 일은 없는데. 아침을 먹는 걸 안 좋아하나? 별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럼 점심으로 뭘 먹으면 좋을까.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식당가가 있다는데…. 이호열이 우리에게 침을 튀기며 말을 했다. 나리가 갑자기 손을 살며시 들었다. 우리는 모두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리의 얼굴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놀이공원이 호숫가 근처라 바람이 꽤나 날카로웠다. 저러면 집 가서 팩을 해주면 좋은데.


나리가 도시락을 싸 왔어. 유리가 말을 했다. 나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초등학생 때처럼 그녀는 자기 발끝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오늘 내내 나리의 손에 들려 있었던 종이 가방의 존재를. 터미널에서 첫 만남에서부터, 버스 안에서, 수원지를 걸으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손에는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아, 그게 도시락이었구나. 호열이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하지. 그럼 저렇게 큰 가방을 왜 들고 왔겠어? 그래서 내가 물어봤잖아, 뭐냐고. 뭔지 몰라서 물어본 거잖아. 아니 어쨌든. 유리는 잠시 호열이와 투닥투닥하더니 나를 쳐다보고 말했다. 너는 저거 뭔지 궁금하지 않았어?


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나리가 큰 종이 가방을 들고 왔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부산에서 시내버스를 탈 때는 인지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왜 나는 나리에게 이것이 무어냐고 물어보지 않았을까. 아니, 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는 그녀에게 대신 들어주겠다거나, 아니면 괜찮냐 거나 같은 걱정해 주는 말 한마디를 할 생각조차 못 했던 것일까.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나 자신에 대한 책망.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때의 생각을 할 때면 밀려오곤 하는 감정들이다. 왜 그땐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순간은 스쳐 지나갔고, 그때의 나는 미숙했던 것을. 가슴 두근거리는 감정 외엔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던 나였던 것을.


길어진 침묵은 대답을 대신했다. 유리는 연민인지, 경멸인지 모를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길은 단짝 친구가 꽉 움켜쥔 종이 가방으로 향했다. 이거 때문에 나리 오늘 일찍 일어났어. 스쳐 지나가듯 유리가 말했다. 아마 내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겠지. 그때는 몰랐지만.


우리는 놀이공원에서 조금 떨어진 휴게 공간으로 향했다. 나무와 벤치가 조성되어 있어서 날이 좋으면 돗자리를 깔고 충분히 피크닉을 즐길 수 있을 만한 곳이었다. 호열이가 어디에선가 잽싸게 돗자리를 구해 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놀이공원과 휴게공간은 호수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롤러코스터를 탈 때 내리막에서 호수에 열차가 처박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바이킹을 타면서도 호수에 던져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잘 만든 놀이공원이었다. 다만, 조그만 문제가 있었다. 놀이공원 자체가 수원지가 위치한 언덕 중턱에 위치한 탓에 바람이 꽤 불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놀이공원을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바람은 그렇게 신경 쓰이는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유원지라는 곳 자체가 날씨 좋은 봄이나 가을에 가장 성수기를 맞이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놀이공원을 방문했을 때는 1월 말, 한겨울을 지나는 시기였고, 높이 떠오른 태양이 무색하게 나무를 헤치며 달리는 바람의 날카로움은 충분히 매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나 돗자리를 깔려고 노력하는 나와 호열이에게 바람은 조그만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정오에 가까워져 조금은 풀린 날씨와는 반대로 바람은 여전히 쌩쌩 불었다. 목 좋은 곳을 찾아 자리를 펴려고 하면 바람은 짓궂게도 돗자리를 날려버렸다. 신발로 고정을 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워낙 매서운 바람이 때때로 불어서 체중을 싣지 않은 신발과 돗자리를 함께 날려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몇 분을 고생하며 겨우겨우 자리를 폈다. 자리를 폈다기보단, 돗자리를 고정하는 생체 핀이라는 게 더 정확한 묘사일 테지만. 나와 호열이는 남은 둘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리와 유리 또한 자리를 잡는데 많이 고생을 했다. 왜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거야. 나리가 겨우 자리에 앉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녀는 돗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 위에 도시락이 들어있는 종이가방을 올리고, 양손으론 손잡이를 꽉 잡은 채, 그녀는 가만히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머리가 길어서 바람이 불면 참 귀찮겠다. 나는 여전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돗자리 가운데 공간을 손으로 치웠다. 음식을 놓을 공간은 깨끗해야 하니까. 바람 때문에 부러진 잔가지들이 돗자리 위에 올라와 있었다. 나리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대충 정리가 된 것을 확인하고 가방을 돗자리 가운데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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