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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이가방을 중점으로 원형으로 둘러앉았다. 파블로프 효과인지 뭔지 가방 안에 우리가 곧 먹을 도시락이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엄청 배가 고파졌다. 나리가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다. 총 3단으로 된 도시락이었는데, 1단에는 김밥, 2단에는 유부초밥, 3단에는 여러 가지 과일이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된 채 들어 있었다. 나리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녀의 볼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싫어서인지, 아니면 기대가 되어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리는 김밥과 유부초밥이 담긴 통의 입구를 열었다. 반투명한 뚜껑으로 가려졌던 음식들의 실물이 만날 수 있었다. 매우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다른 두 명도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먹어도 돼? 유리의 질문에 나리가 응, 먹자. 대답하는 걸 듣자마자 나와 이호열은 손을 뻗어 음식을 집었다.
도시락에는 종류가 많다. 우리 부모님 때 사용했던 사각형 모양의 양은 도시락이라던가, 아니면 유치원생 시절 나들이를 갈 때 어머니께서 싸주신 민트색 찬합 도시락, 혹은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고 야간 자율학습 때 먹으라고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조그마한 보온 도시락 등등. 디자인도 다양하고 홍보하는 기능도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나리는 그날 사각형 모양의 피크닉용 도시락을 들고 왔다. 정육면체처럼 생긴 도시락의 맨 위에 위치한 뚜껑을 제거하면, 한단, 한단 음식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형식이었다.
문제는 그 도시락이 보온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유부초밥을 집는 순간 손끝을 통해 차가운 한기가 전해졌다. 나는 재빨리 호열이를 쳐다보았다. 녀석도 김밥을 집은 그대로 굳어버린 듯 했다. 우리는 눈빛을 교환했고,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집어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입에 들어가면 다를 수 있어. 마음속으로 되뇌며 유부를 씹었다. 입 속 가득 차가움이 퍼졌다. 꼬들꼬들함을 넘어선 밥알은 한알 한알 자기주장을 하며 입 속에서 흩날렸다.
맛이 어때? 유리의 물음이 들렸다. 눈길을 돌리니 나리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유부초밥을 맛있게 먹을 수도 없었다. 우리가 답이 없자 나리도, 유리도 각자 유부초밥과 김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특히 나리의 얼굴은 화면이 멈춘 듯 경직되었다가, 목부터 서서히 붉은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나리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도 느껴지는 그녀의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은 그 자리에 있는 넷 모두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때 무언가라도 말을 해서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트려 버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십 대 시절의 나는 그런 상황판단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숙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음식을 하나씩 들고 말없이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쉭쉭 거리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확히 물리적으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당혹스러운 침묵은 끝없이 이어졌다. 마침내 내가 호수에서 눈을 돌려 나리를 살펴볼 용기를 쥐어짜 냈을 때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든 지금 상황을 끝내준다면 환영이었다. 그곳에는 나리가 있었다. 그녀는 본인의 신발을 집어 들고 있었다. 나는 나리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당당히 쳐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다면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리는 얼굴을 숙인 채 신발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그런 탓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체 커다란 그녀의 눈은 그녀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커다래진 눈동자와, 눈가 주위에 고인 눈물자국, 그리고 볼만큼 빨개진 흰자위.
그것은 정말 찰나와 같았다. 나리는 신발을 쥐고, 일어서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유리는 잠시 뒤에 나리를 쫓아 자리를 떴다. 나와 호열이는 멍하니 돗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여전히 바람은 쌩쌩 불었고, 신발이라는 두 개의 꼭짓점을 잃은 직사각형의 돗자리는 바람이 추는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나는 나리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으나, 정확히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계속 입 속의 유부를 질겅거리며 앉아 있었다.
도시락을 준비한다는 것. 지금의 나는 누군가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밥을 짓고 김밥을 마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외에도 꽤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하지만 십 대 시절의 나는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단순히 너무 차갑긴 했어.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
그렇게 야심 찬 17세의 더블데이트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후의 상황 중에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잠시 후 유리가 돌아와서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게 낫겠다고 말한 것, 그리고 속없게도 흔쾌히 알겠다고 내가 대답한 것, 함께 뒷정리하며 보온 도시락을 사용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눈치 없이 말을 내뱉은 것, 그리고 그 발언에 호열이와 유리가 동시에 나를 나무라듯 쳐다본 것, 그 정도였다.
유리는 나리가 진정되면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말했다. 호열이가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유리는 거절했다. 나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아쉬웠지만 호열이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 둘은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열이는 호열이대로, 나는 나대로 무언가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뒤늦게 그때의 상황을 복기하며, 왜 그런 말을 했지? 왜 그때 위로하는 말을 못 해준 거지? 와 같은 후회의 늪에 빠져 있었고, 호열이는 호열이대로 유리와의 무언가를 진전시키지 못한 점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오후에는 길이 많이 막혔다. 2시간이 넘게 걸려서야 고향 버스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와 호열이는 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말없이 한참을 있었다. 다른 감정보다는 그냥 멍했다. 공허하다고 해야 하나. 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한참을 보낸 후에야,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어머, 일찍 왔네?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께서 놀란 듯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그대로 내 방으로 향했다. 문을 닫고 한숨을 한번 쉬었다. 머리를 문에 기대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벽에 붙여놓은 슬램덩크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라고요. 대사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왜 그런 용기가 없을까. 아, 몰라.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후 학원에서 우리는 계속 마주쳤다. 하지만 그날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대로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해서, 그녀는 그녀대로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시간은 계속 흘렀고 그날의 일은 한 겨울날의 꿈처럼 점점 잊혀 갔다. 1월이 2월이 되고, 우리의 선행학습도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와 호열이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함께 앉아 수업을 들었고, 나리와 유리도 옆 분단에서 우리와 똑같이 행동했다. 우리 넷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만을 가끔 나누었고, 나와 호열이는 옆 분단의 여자아이들보다는 원래처럼 남주나, 다른 남자 녀석들과 어울렸다.
학기 중에는 그렇게도 가지 않던 시간이 방학 중에는 참으로 빠르게도 흘러갔다. 눈 깜빡하니 2월은 중순이 다 되었고, 밸런타인데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일찍 이성에 눈을 뜬 몇몇 녀석들은 밸런타인데이가 오기 며칠 전부터 누가 누구에게 초콜릿을 받을 것 같이 마네 하며 강의실의 온도를 뜨겁게 올리기 시작했다. 나야 물론 관심은 있었지만, 내 자그마한 자아 탓에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냥 초콜릿 이야기가 나오면 흘깃 나리 쪽을 쳐다보는 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집에 가는 길에 호열이와 대화를 나눴다. 초콜릿? 호열이가 말했다. 나야 받을 생각도 안 해. 내가 오히려 줘야 하는 입장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밸런타인데이는 여자가 주는 날인데? 내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여자애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을 때 이야기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호열이를 쳐다보았다. 녀석의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이 나에게 출처를 알 수 없는 애잔함을 불러왔다. 하지만 친구에게 딱히 해줄 말이 생각나지는 않았고, 나는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