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일기

2-9

by 세타필

나리는 너한테 줄걸. 한동안 말없이 걷던 호열이가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응? 초콜릿 말이야. 내가 반문하자 호열이가 살짝 짜증을 내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냐? 뭐가. 그날 도시락도 싸 왔는데, 초콜릿이야 당연히…. 호열이는 목소리 높여 말하다, 내 표정을 보곤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내가 조용히 말했다. 음식 맛없다는 표정이나 지은 사람한테 정이나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 아닐까. 호열이는 내 말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네. 우리가 그날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잖아. 그러니까. 근데 그게 우리 잘못만은 아니야. 누가 그렇게 김밥이 차가운 줄 알았냐고. 그러니까. 녀석의 변명을 들으며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됐어. 호열이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랬으면 안 됐어.


나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무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녀석의 말이 잘못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화르르 타올랐다 이내 불길을 삼켜버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 나리를 어떻게 생각해?


나리? 그냥…. 초등학교 때 짝꿍을 했던 여자아이지. 그게 다야? 응? 그게 다냐고, 나리에 대한 감정이. 내가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지 못하자, 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마음을 아직 모르겠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확실히 하는 게 좋아. 말이든, 행동이든. 나는 걷다 멈추어 서서 호열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대치 끝에 호열이가 말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너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잖아.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


2월 14일이 도래했다. 나는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날에 대해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평소처럼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하고, 학원에 갈 채비를 했다. 학원에 도착해서도 평소와 별로 다를 건 없었다. 수업 시작 전 남자 놈들끼리 동네 친구 누구가 누구에게 초콜릿을 줬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아, 오늘이 밸런타인데이구나 하는 정도가 다였다. 사실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는걸 인지하고 흘깃 나리를 바라보긴 했다. 내가 정확히 뭘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처럼 수업을 들었다. 과학 선생님이 수업 중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고, 혹시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 있냐는 장난스러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 것 외엔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았다. 수업이 끝났고 하원을 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같은 반 남자 놈들 모두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곧 고등학교 대비반도 끝이 나고 다시 반이 배정될 텐데, 그 외 고등학교 반 멤버들끼리 나름의 종업식을 하자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남주가 제안을 했고, 우리는 모두 오케이를 했다. 사실 남자들 전부라고 해 봤자 6명이 전부였기에, 의기투합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선행학습 과정을 들으며 우리는 모두 서로 나름 친해지기도 한 터라 저녁 식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호열이가 학원 근처에 감자탕을 매우 잘하는 집을 안다고 했다.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자리를 떴다. 서로 조금 친해진 아이들끼리는 강의실을 나서며 오늘 재미있겠다. 너도 갈래? 와 같은 대화들이 오고 갔다. 남자 녀석들은 서로 와글와글 떠들며 수학 선생님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러 간 남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 분단을 슬쩍 쳐다봤다. 다른 여자아이들 모두가 강의실은 나섰는데, 나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이제서야 필기구를 챙기고 있었다. 출구를 바라보니 나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한 유리의 모습의 반쯤 보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문이 닫히며 고리가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한 30초쯤 지났을까, 문이 다시 벌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남주가 돌아왔다. 아, 뭐야. 너무 늦었잖아, 인마.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남주를 비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자탕집을 갈 차례였다. 나도 남주에게 한마디를 거들며 가방을 둘러멨다. 그 순간 남주가 본인 손에 들린 무언가를 책가방에 넣으며 나를 불렀다. 왜? 내가 묻자, 녀석이 처음 보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리가 너 좀 보자는데?


삽시간에 강의실은 조용해졌다. 모두가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처음 겪는 상황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남주에게 다시 물었다. 왜? 나야 모르지. 나가봐 어서. 녀석은 빨리 나가라는 듯 손을 까딱거리며 나를 채근 했다.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한 채로 강의실 밖을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리와 유리가 보였다. 유리는 내가 나온 것을 확인하더니, 나리에게 무어라 귓속말하곤 먼저 자리를 떠났다. 강의실 복도에는 나와 나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괜히 어색해졌다. 이렇게 둘이 서로를 쳐다보는 건 어린이 대공원에서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색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쭈뼛거리며 나리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쥐고 있던 종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더니, 불쑥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괜히 얼떨떨 해져 그 손을 가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나리가 채근하듯 말했다. 받아. 나는 선물을 처음 받아보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손을 내밀어 나리의 손에 놓인 무언가를 건네 받았다. 선물을 받았으니 고맙다고 해야지.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고, 나는 그의 말에 순응하기로 했다. 고마워. 나는 뻗은 손을 부자연스럽게 유지한 채 말했다.


그 말에 나리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지만 눈을 돌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기로 했다. 내 반응이 정답이었을까,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리가 비로소 입을 뗐다. 오늘 밸런타인데이야.


아, 응. 그렇다더라.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려보았지만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더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하얘져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입을 떼며 어버버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다시 흘렀고, 나리가 다시 말을 했다. 오늘 재미있게 놀아. 그러고 그녀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


나는 몽롱해진 기분으로 문을 열었다. 내가 다시 강의실에 들어서자, 남자 녀석들 모두가 낮은 목소리로 입술을 둥글게 말아 소리를 냈다. 특정하기 힘든 원순모음의 소리가 강의실 벽에 부딪혀 공간을 울려댔다. 그 소리 덕분에 나는 내가 3개로 보이던 세상에서 돌아와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남주와 호열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등을 퍽퍽 내리쳤다. 다른 녀석들도 다가와서는 한마디씩 거들며 팔뚝, 등, 가슴 등등을 밀쳐댔다. 어린 나에게, 그것은 흡사 영화 속에서나 본 승전한 장군을 맞이하는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나리가 준 선물은 두 가지였다. 서울우유라고 쓰인 빨간 글씨와 초콜릿의 모습이 크게 박힌 초코우유와, 그 우유갑 뒤편에 붙어있는 편지 모양의 쪽지. 학원에서는 친구들의 눈이 너무 많아 읽지 못한 편지 말이다. 급하게 뒷주머니에 밀어 넣었던 쪽지는 그때부터 줄곧 내 바지 주머니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고, 나는 감자탕집에서부터 편지가 들어있는 주머니 쪽의 엉덩이가 이상하게 감각이 예민해진 것은 기분을 느끼며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날 감자탕집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였다. 친구 놈들은 내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야유와 환호 그 어딘가에 위치한 소리를 저음으로 내뱉었고, 그 소리는 그날의 웃음벨이 되어 모두를 즐겁게 했다. 그래, 너희가 즐겁다면 그걸로 된 거야.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마음으로 밥을 먹었고, 덕분에 맛 같은 걸 따질 생각도 못 한 채 그냥 감자탕을 흡입하기만 했다.


우리의 회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뒤통수에서 와 소리가 들리는 걸 애써 무시하며 나는 호열이와 함께 다른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친구들과 멀어지고 인적도 없는 거리에 들어서야, 나는 쪽지를 열어 볼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상하게 말이 없는 호열이에게 나는 나리의 선물과 쪽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녀석은 지금은 괜찮을 거라며 어서 내가 쪽지를 읽어보기를 권했다.


뒷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들었다. 급하게 뒷주머니에 쑤셔 넣느라 종이는 많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쳐 글을 읽었다.




안녕. 나 나리야.


오늘 밸런타인데이래. 알고 있었어?


그날 도시락은 미안했어.


다음번에 또 같이 놀러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안녕.


우유 많이 먹으면 키가 쑥쑥 클 거야.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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