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그것은 바로 스스로 생각하고 결심하지 않은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노력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가짐이라는 것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만 발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니까. 수능을 못 친 사람의 비겁한 변명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을 해 보면 그 이유가 중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물론 이런 생각을 수험생이던 내가 하지는 못했다. 어쩌겠나. 인생에서 무언가 열렬히 바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이 처음으로 선로에서 벗어나 버린 것을. 탈선한 열차에 친절히 다음번 목적지를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런 건 존재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의 경로는 내가 정해야 하는 것이니까. 결국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살아온 나는 그때도 똑같이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씀대로 성적에 맞춰서 내가 바라는 곳과는 조금 달랐던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 예비 소집을 가는 날에도 패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꽤 힘이 들겠는데. 이런 감정 상태로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그때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반대로 학기가 시작되자 우울한 감정은 금세 사라졌다.
대학은 말 그대로 별천지 그 자체였다. 새터, OT, 축제…. 별별 행사와 모임들이 많았고, 신입생이었던 나와 동기들은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우리도 역시 수험생활 동안 억눌려 왔던 무언가를 분출하고자 열심히 활동했다. 재미있었다. 가끔은 작년과 너무도 다른 내 생활에 스스로 의아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에이 뭐 어때. 대학생 들어가면 놀라고 했잖아. 어른들이 항상 했던 말을 되뇌며 걱정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기는 했다. 작년의 나는 어떤 연유로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에 가고, 별들을 보며 집에 가던 생활을 했는지. 지금의 나는 어떤 생각으로 정오까지 잠을 자고, 해가 뜰 때까지 술을 마시는 생활을 하는지.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도대체 무엇이 다르길래 이렇게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들 때도 잠시뿐, 나는 어느새 친구의 전화를 받고 다시 밖을 나가곤 했다.
정신을 놓은 채 살다 보니 어느새 학기가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하나를 배웠다. 무언가를 하든 일단 바쁘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점 말이다. 물론 좋은 쪽으로 바쁘지 않았던 것이 나의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여자친구도 생겼다. 우리 단대의 다른 과 신입생이었는데, 단대 건물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던 아이였다. 눈이 마주치면 눈동자가 이쁘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정말로 눈이 맞아 버렸다.
공부라는 것은 어느새 뒷전이 되었다. 친구들은 모두 여자라든가, 스포츠, 아니면 게임 이야기만을 했다. 나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친구들과 동화되었다. 이건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야. 친구들과 나는 그렇게 되뇌며 젊음을 탕진했다.
썩 나쁘지는 않았다. 낭비라는 게 없는 인생이 과연 즐거울까를 생각해 본다면,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특히 젊고도 젊은 삶에 낭만이라는 것 없이 무엇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낭비가 있어야 낭만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어느새 1학년 생활이 끝났다. 내 손에는 입영 통지서가 들려있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입대를 했다. 102보충대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추위에 벌벌 떨며 훈련소를 마쳤다. 나는 연천으로 배치되었다. 생각보다 군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나빴다. 매우 나빴다. 그래도 어찌어찌 잘 해냈다. 힘든 일이 있기는 했다. 군대에서 여자친구와 이별했다. 눈동자가 매우 반짝였던 그녀는 나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다. 이성을 좋아한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친구였는데…. 전화 통화는 무덤덤하게 마쳤다. 내 속은 그렇지 않았지만.
처음엔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그냥 문득문득 생각이 나다, 아 헤어졌지. 그러곤 그냥 약간 공허해지는 기분이 드는 정도였다. 이별 뭐 별거 없네.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다, 후유증이라는 게 시차가 있다는 걸. 어떤 사람들은 헤어지고 1달 후, 아니 6개월 후, 혹은 1년 후에도 갑자기 찾아온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오히려 군인이라 다행이었다고도 생각한다. 군복과 함께하는 삶 덕분인지 생각보다는 빨리 폭풍이 지나갔으니까.
전역을 했다. 내가 벌써 22살…. 곧 23살이 되겠지. 세월이 참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뭘 어떻게 하겠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어라도 하려고 아등바등하는 수밖엔. 열심히 복학 준비를 했다. 군대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내가 이것도 했는데, 무얼 못하겠어?’ 하는 자신감이었다. 그랬다. 2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야망으로 똘똘 뭉친 청년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다.
세상을 씹어먹어 볼래. 말도 안 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채 나는 열심히 복학 준비를 했다.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중 연락을 받았다. 초등학교 동창 인호였다. 초등학생 시절 5학년과 6학년 동안 엄청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그는 5학년 초에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으나, 한마디 한마디가 엄청나게 웃긴 그런 녀석이었다.
굉장히 반가웠다.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우리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서로 다른 학교에 배정되었다. 하필 두 학교는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휴대전화가 없었던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다. 너 전화번호 찾는다고 엄청나게 고생했어, 인마. 녀석의 첫마디였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 했는데, 내 번호 어떻게 알았냐? 나는 실실 웃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다 방법이 있다 이 말이야. 너, 뭐, 셜록 홈스야? 어.
오랜 친구와의 대화는 참 재미있었다. 정신없이 떠들던 중 인호가 말을 했다. 내년 초에 동창회를 한다고 했다. 정식으로 하는 건 아니고, 연락이 닿는 친구들만 일단 부르는 중이라고, 본인이 6학년 O반 담당이라고 했다. 올 거야? 뭐, 보고. 아, 좀. 가야지. 장난이야. 그래, 알겠어. 그때 보자. 응.
초등학교 동창회라니…. 내가 동창회를 할 나이가 되었구나. 신기했다. 일단 가겠노라. 대답은 했지만, 막상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참석이 망설여졌다. 초등학생 시설 내가 엄청 사교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휴대전화도 없어서 연락하는 친구들도 많이 없는데…. 아, 몰라.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은 하는 일에만 집중해. 나는 동창회에 관한 생각을 머릿속 저 깊은 곳에 던져 놓기로 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은 금세 다가왔다. 새해가 오고, 한 살을 더 먹고, 동창회에 가기로 한 날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태생부터 극 내향인이었던 나는 고민했지만, 결국은 동창회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번이 아니면 게네들은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인호도 그렇고 다른 아이들도 그렇고. 한 번쯤은 다시금 친구들을 보고 싶었다.
문득 나리도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짝꿍이었던, 중학교 시절 학원도 같이 다녔었던 나리. 여전히 하얀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5시간 넘게 걸리는 여정 동안 나는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얘가 왜 이럴까. 사실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리 때문이었다. 생각의 물결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는 커다란 파도가 일었다.
사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이후, 가끔 그녀 생각이 날 때가 있었다. 함께 당산을 갔었던 기억이나, 함께 어린이 대공원을 갔었던 기억들 말이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졸업앨범을 뒤져 그녀의 집 전화번호로 전화를 건 적도 있었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안녕하세요. 나리네 집인가요? 용기를 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잘못 거셨나 본데요. 대답을 듣고 아쉬워한 적도.
나리도 동창회에 올까? 한번 떠오른 질문은 머릿속에서 사라질 줄 몰랐다. 고향을 향해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고향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고, 나는 피곤함에 잔뜩 찌든 얼굴로 본가를 방문했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어이구, 얼굴이 반쪽이 됐네. 사과 깎아줄까? 어머니의 권유를 피곤하다며 거절하고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방은 내가 집을 떠날 때와 똑같이 꾸며져 있었다. 오히려 지금이 더 정갈하고 깨끗해 보였다. 방구석에 상자 한두 개 더 놓여 있는 걸 제외하면 예전과 달라진 것도 없었다. 침대 위에 그래도 붙어있는 슬램덩크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좋아합니다. 이번엔 진짜라고요. 어린이 대공원에서 있었던 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용기…. 내가 참 많이 부족했던 것. 내일 볼 수 있으려나. 갑자기 떠오른 이 감정은 뭘까.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 모르겠다. 배가 고파졌다. 사과 먹을래요. 외치며 방을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