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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면진 Aug 26. 2024

애착은 생존본능

결국 인간은 누일 곳이 못 된다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석과 옥동의 이야기에 눈길이 자주 간다. 한 20번 봤으려나.


짐칸도 모잘라 운전석 뒤에도 한가득인 짐을 이고 지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동석의 트럭은 언제나 힘겹고 위태롭다. 동석은 하필 집도 언덕위에 있어 트럭을 주차하면 쓰러질 것만 같이 기울어있다. 안정되어 보일 때는 그나마 평상 위에 트럭에 가득이던 짐을 좀 내어놓고 발로 탬버린 구르며 “골라 골라 파격쎄일”을 핏대 세워가며 외칠 때다. 사연이 구구절절한 자신의 과거를 소화 못 하고 있는 동석의 내면이 그대로 보인다. 동석의 트럭은 곧 동석이다.


기울어 넘어질 듯한 동석의 짐 무거운 트럭. 트럭은 동석을 보여준다.


동석은 자신의 엄마가 그렇게도 밉다. 친구네에 엄마가 작은 어멍, 첩으로 들어가며 자신에게 엄마라 부르지도 말라하자 동석은 애걸한다. 그 애걸하는 어린 새끼에게 안아주지는 못할 망정 싸대기를 입이 터지도록 갈긴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 어쩌다 자신의 형제가 된 망나니 친구들에 얻어맞아 멍든 자신의 배때지를 굳이 보여줘도 멀뚱멀뚱한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다 늙은 엄마가 장사하는 시장 밖에서 장사한다. 엄마가 있는 제주를 떠나지 않는다. 밉다는 건 애정이 있다는 것. 싫으면 죽던 말던 냅두겠지만 마음에 미움이 일며 습한 무언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애정이 있다는 뜻이다.


굳이 엄마가 물건 파는 시장 입구에서 장사하는 동석. 미움에는 애정이 있기 마련.


동석의 엄마 옥동은 줄초상을 치뤘다. 어릴 땐 부모가, 커서는 오빠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딸까지. 남겨진 아들새끼 하나 건사하기엔 인생 너무 지쳤다. 첩으로 들어가 밥이라도 그 집에서 먹여주면 감지덕지다. 작은 어멍으로 죽기 전 갔던 목포 큰 아들네서 제삿상을 뒤엎고 난리 핀 건 동석에게 깊은 죄책감이 있어서였으나 동석이 자신에 미안한 게 없느냐는 말에는 미안할 게 뭐있느냐고 말한 건 미안하다는 말조차도 죄스러웠던 것과 더럽게도 꼬인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이 섞인 복잡한 말 아닐까.


바닷가는 응당 속 시끄럽기 마련이다. 고랫적부터 그랬다. 바다에 나간 남정네들 목숨은 항상 위태했고 남정네들 보내고 남겨진 아낙네들은 억척같이 살았어야 했다. 그러니 없는 신이라도 만들어 자신 남편 살아오도록 기도했어야 했다. 그 와중에 철없이 피끓는 육신 주체 못해 남자 냄새 진하게 뿜는 남정네들은 여자 돌아가며 정을 나누기도 했다. 바다에 들어가 뭐라도 캐는 아낙네들은 죽음을 매번 직면하기 마련. 바닷가는 비린내나는 동네가 아닐리가. 그러니 동석과 옥동의 이야기는 있을만한 얘기다.


이제야 안아보나 싶은 동석.


조용히 숨이 거둬진 엄마를 굳이 동석은 안아본다. 그 장면에서 노희경 작가가 주문한 감정은 “이제야 안아보나 싶다”였다. 인생들은 왜 화해를 살을 부대끼며 해야 제대로 하는 것 같은가. 하다못해 악수라도 해야 한다. 인간이라는 게 본래 그렇다. 창조주와 분리된 후 인간의 DNA에는 애정결핍이 탑재돼 있다. 그러니 애착은 생존본능이다. 애착은 마음뿐 아니라 살도 맞대야 해결이 된다. 약속할 때 새끼손가락이라도 걸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동석과 같은 이들이 지천인 것은 애정결핍의 사회화다. 노인들은 사랑한다는 소리 듣고 싶어 콜센터 전화하잖나. 나이 먹고 언제적 사랑타령인가 싶지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애정을 갈구한다. 남에게 받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라도 받아야 직성이 풀린다. 이기심은 자아도취이고 자아도취도 다 애정결핍이다. 이기심에 쩌든 이들이 짜증스럽다만 한편으로는 불쌍한 인생이다. 다시 말하지만, 애착은 생존본능이다.


그러나 인생들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다. 유명 모델출신 연예인은 자기 성격답게 ‘연락 강요하는 친구가 손절대상 1호’라며 본인의 의존성과 외로움을 본인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인생들만큼 한심한 인생이 없다는 듯 말했다. 맞는 말이다. 넘치는 의존은 반드시 다뤄야하는 심리적 문제이다. 그러나 기댈 곳없어 목 매다는 인생들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한국에서 이런 소리는 철 없다. 진정으로 우정이 있다면 그런 인생을 도와야지 손절치는 건 결국 이기적이다. 돕는 의미에서의 단절을 그 연예인이 해봤을까? 그러기엔 너무 속 좁고 철없어 봰다.


그럼에도 인간의 품은 한정적인 데에는 동의한다. 코에 호흡이 붙은 인생들 의지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은 격언쯤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뭐에라도 의지해야할 만큼 모지라고 허접하다. 자신들이 대단한 냥 시끄럽게 떠드는 인생들도 다 허접한 구석이 있다. 그러니 인생이다. <인간 중독>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시사하는 바처럼 인간에 중독되면 불탈 밖에 더 있나. 뭐든 중독되면 파멸이다. 애착이 향하는 길이 그렇게 완전하지는 않다.


나는 지천에 널린 동석이들이 ‘쉴 만한 물가’로 이미 초청됐음을 알았음 한다. 그들의 짐을 내팽겨칠 곳이 있음을 알았음 한다. 생존본능인 애착에 어쩔 수 없이 끙끙 메는 자신들의 피곤한 인생을 누일 수 있는 곳이 있음을 알았음 한다. 그리고 나도 나를 그 곳에 누이고 싶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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