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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May 28. 2023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의미 없는 우주 속에서 찾는 진리

코미디와 사이언스 픽션의 조합을 만들고 싶은 저자는 ‘세상에 대한 불만’ 속에 6개의 종말론적 줄거리로 풍자한다. 다만, 미지의 이해불가한 종족과 행성이 등장하고, 사건들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얽히고, 심지어 6개 에피소드조차 옴니버스식이라 머릿속에서 재배열하는 중노동은 기본이요, 복선을 놓칠세라 전전긍긍하다 뜻밖의 연결고리를 만나 희열, 인내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으니, 일주일의 지구 시간을 이보다 알차게 보낼 수 없다는 자기 위안은 차치하고라도 1222쪽 완독의 위업은 분명 과시할만하다.


아서 덴트는 집을 부수고 우회로를 내려는 불도저에 맞서 진흙탕에 누워 항의한다. 친구 ‘포드 프리펙트’(안내서를 집필하기 위해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는 급한 일이라며, 아서 대신 공무원을 그 자리에 눕히고 함께 술 한잔 하러 간다. 급한 일이란 ‘보고’ 인들의 전함이 5분 후 지구를 박살 낸다는 것. 이유는? 자신들의 우회로를 만드는 데 ‘지구’란 보잘것없는 행성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아서는 포드 덕분에 전함으로 도피하여 살아남고, 뜻밖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이후, 포드의 친구이자 은하 대통령인 자포드 비블브락스, 천체물리학자이자 리포터인 트릴리언, 편집증 로봇 마빈을 만나고,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를 장착한 ‘순수한 마음 호’를 타고 우주를 누빈다. 갑부에게 행성을 만들어주는 사업을 하다 경제위기로 동면에 들어간 행성 ‘마그라테아’, 일확천금을 노린 자포드를 따라 간 행성이지만, 여기서 아서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범차원적 존재들의 궁극적 질문인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슈퍼 컴퓨터 ‘깊은 생각’을 만들고 질문한다. 무려, 칠백 오십만 년의 연산 결과는 ‘42’.


질문이 잘못된 것인가 싶어 다시 궁극적 질문을 찾기 시작하고, ‘깊은 생각’은 더 뛰어난 컴퓨터를 설계해 주는데 그것이 바로 ‘지구’다. 그런데 지구가 파괴된 것이다. 마빈의 도움으로 적 시스템의 자살을 유도하여 간신히 마그라테아에서 벗어난 일행들. 식사를 하러 우주 끝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가, 우주멸망을 피해 벗어나던 중 서로 다른 차원으로 헤어진다.

이쯤 되면 신에게 직접 묻고 싶어 진다. 자포드와 트릴리언의 여행은 의미심장한 답으로 안내한다. 비가 퍼붓는 축축한 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누추하게 살아가는 ‘신’은 ‘내가 어찌 알겠냐’는 대답만을 할 뿐, 책상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주일 동안 책상에게 말을 걸기만 한다.

홀로 진리를 찾아 헤매던 아서는 지구를 닮은 행성에 불시착한 후 샌드위치를 만들며 평온하게 살아가는데, 안내서 본부로 돌아갔다가 곤경에 처하고 새 모양의 제 II형 안내서의 도움으로 벗어난 포드와 갑작스레 재회한다. 트릴리언이 아서의 딸이라며 데리고 온 랜덤에게 놀랄 새도 없이, 딸의 사춘기적 돌발행동에 어쩔 수 없이 지구로 돌아간 아서와 덴트. 그동안의 모든 사건들이 드디어 하나로 귀결된다.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p957


이제 상상의 나래를 접고, 생각해 본다.

인류는 지구 안에서만 옥신각신하는 미개 종족이다. 우주선을 쏘아대며 자축하지만, 인간을 태우고 태양계를 벗어나기는커녕, 지구 자원마저 이미 갉아먹어 식민지 행성으로서의 가치도 없다. 인간을 식량으로 삼는다면 모르지만. 다만, 대견하게 핵분열과 시공간 개념도 알고, 골든 디스크를 실은 보이저 1호를 남겼으니, ‘대체로 무해함’은 더없이 타당하다.


우주 차원의 흥망성쇠는 단순히 충동이나 이해관계에 의할 뿐, 어떠한 자비도 기대할 수 없으며, 특별한 삶의 의미도 개연성도 없다는 세계관. 시공간이 뒤틀어지고 얽혀 선후관계도 의미가 없을지라도, 일어날 일은 이미 정해져 있고 피할 수 없다는 운명론적 세계관으로 읽힌다. SF의 형식을 빌린 ‘시지프스의 신화’랄까. 물론, 신은 형벌을 명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 모른다’고 시치미 떼며 우주를 방기함으로써, 모든 존재들의 목적과 의미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야말로 더 가혹하지 않은가. ‘존재들아, 가만히 있어 뭐 하는가, 돌이라도 밀어 올리고, 따라 내려가는 순간에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라. 누군가 항변의 기회도 없이 지구를 날려버려도 억울하지 않게’


그다지 읽을 것 같지 않기에, 마치 무풍지대의 거대하고 오래된 벽돌 표면을 옷깃으로 닦았더니 다음과 같은 신의 계시가 적혀 있었다한들 누가 따지랴.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p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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