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사이 Jun 20. 2023

한국형 SF에 대한 기대

‘호랑이가 눈뜰 때’를 보고(책 소개 겸)

매서운 눈빛과 날카로운 발톱의 호랑이가 매혹적이다. 아름다운 문양의 노을빛 우주 저편에서 어슬렁거리며 어둠의 안개를 몰아내는 듯하고, 무지갯빛 아지랑이처럼 스며드는 호랑이 기운은 더없이 아름답다.


SF(Science Fiction)라는 다소 생경한 독서지평을 열기 위해 덥석 물었지만, 첫 만남은 역시 낯설기만 하다.


‘전 세계가 열광한, 한국 신화와 SF의 독특한 만남’

책 뒷면의 도발적이고 강렬한 문장만을 나침반 삼아 책을 펼친다. 하지만 문장이 선입견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모험이란 어떤 미래와 조우할지 알 수 없기에, 희망에 비례하여 기대를 품을 수 있다.


SF란 무엇일까.

실현 가능성과 상상력의 줄다리기가 아닐까.

SF작가는 상상력의 외연 확장 속에서, 얄궂게도 실현 가능성의 경계를 독자와 타협함으로써, 허구를 마치 실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확실한 것은, 딱딱한 고전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상상력의 기지개를 켤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저자 이윤하는 『흐드러진 봉황의 색채』로 친숙한 이들도 많다. 그런데, 한국계 미국인 SF작가로 이미 해외에서는 유명하다. 코넬대를 거쳐 스탠퍼드대 수학 박사, 트랜스남성이라는 저자의 이력은 독특하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스페이스 오페라, 밀리터리 SF에 관심이 많았으나, 이들 작품이 서양문화에 점철된 사실을 아쉬워한다.

결국, 한국식 전통과 신화를 녹여낸 독창적인 작품으로 출사표를 던지고, 휴고상에 3회 연속 최종 노미네이트되며 두각을 나타낸다.


이 책 『호랑이가 눈뜰 때』는 호랑이령 주황 부족의 열세 살 ‘세빈’이 주인공이다.

엄격한 훈련과 규율의 주황 부족에서 우주군 선장 삼촌 ‘환’을 존경하며, 우주군이 되길 꿈꾼다. ‘세빈’은 입대허가 편지만을 고대하며 훈련에 임한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우주군이 되던 날, 함께 전해 들은 충격적인 소식에 기뻐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환’의 반역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아온 입대허가. 아직 어리지만, 호랑이로서의 본능은 불길한 미래를 알린다. 결국, 입대 첫날의 생도 ‘세빈’은 정식 군으로서의 선서도 하기 전에 실전 상황에 처한다.

우주함 해태호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음모들은 ‘세빈’을 숨 가쁘게 몰아세우고, 부족의 명예, 가족 또는 친구로서의 신뢰, 그리고 사건의 진실 사이에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 ‘적들’은 내 동료들이었다’ p228

‘가족이 이렇게 행동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p229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매 순간,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만의 빠른 판단과 실행뿐이다. 해킹을 잘하는 ‘지’, 의료기술에 재능 있는 ‘남규’, 무기를 잘 다루는 ‘유나’, 마음을 홀리는 ‘민’, 그리고 삼촌 ‘환’과 함께 어우러져, 세빈은 그저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 나갈 뿐이다.


자신의 가치판단에서 비롯한 선택의 집합체는 결국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제독은 내가 그 모든 일을 계획했다는 듯이 말했다’ p367


신뢰와 의심은 가역적이지만, 그 끝은 신뢰가 된다. 다행히도.

‘경험이 관점을 뒤집어 놓는다’ p345


한편, 음모의 중심에 있는 ‘드래건펄’은 행성 전체를 죽음의 황무지로, 또는 생명의 생태계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물건’이다.

전작 『드래건펄』은 열세 살 구미호 ‘민’이 그의 오빠 ‘준’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로, 『호랑이가 눈뜰 때』의 앞선 에피소드다. 하지만, 알면 재밌지만 굳이 알 필요는 없는, 독립적 시리즈물이므로 아쉬움은 없다.


삽살개, 잡채 등 한국 고유의 소재를 감미료처럼 뿌려놓은 퓨전 요리의 느낌.

SF가 무엇인지 아직 명료하지 않지만-명료할 필요는 없다-, 이 책 『호랑이가 눈뜰 때』는 세계적 SF물이지만 적어도 한국적이라는 점에서 친숙하다.

한국 문화예술, 한국 일류기술 등이 ‘K-’ 마크를 달고 회자되듯, 조심스레 ‘K-SF’로 부를 수 있다면 앞으로 한국 SF의 세계화에 초석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희귀종 ’ 물고기잡이부엉이‘에 대한 집착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