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에 대하여(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 김경숙 옮김)
화가 나지 않으면 이상한 세상이다. 정상과 비정상이, 상식과 비상식이 뒤집혀 이젠 스스로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화를 낸다. 화는 긍정적 열기인 정열과는 다르게, 부정적이고 공격적이고 파멸을 향하는 에너지다.
작은 성냥 하나에 붙은 불이 어디로 옮겨 붙느냐에 따라 쉬이 꺼질 수도 있고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수 있다. 지금 우리의 화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문제는 방향이 없기에 스스로 타들어가다가 주위 사람까지 태우기 시작한다. 꽉 막힌 뻥튀기 솥을 뜨거운 불길로 데우며 조만간 세상을 향해 터트릴 기세로 들끓고 있다. 터져 나온 것이 뻥튀기면 얼마나 다행이랴, 불씨 붙은 수많은 숯덩이 되어 메마른 들판 향해 날아간다.
비열한 욕망의 거센 바람 타고 훨훨 타오른다.
멀리. 오래.
화가 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신경이 날카로운데 누군가 어깨를 치고 지날 때, 신호나 차간거리를 유지하려 서행하는데 뒤에서 클락션을 울려댈 때, 업무상 고객에게 전화했는데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며 끊어버릴 때, 약속에 늦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다 중심을 잃고 쓰러져 타박상을 입을 때, 미닫이 문에 내가 먼저 손을 댔는데 반대 측에서 힘껏 밀어 문에 심하게 부딪힐 때, 아침을 굶었는데 상사가 시킨 일이 많아 점심도 못 먹고 일도 못 마쳐 혼이 날 때, 상대를 배려해서 양보했건만 상대는 당연하게 여기며 밀칠 때, 등등 우리는 이성을 뛰어넘은 감정의 분출을 경험한다. 감정은 분출되기 시작하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꾹 눌러온 이성의 반발력은 끝을 보고 말겠다는 듯이 힘차게 튀어 오르며 세상에 포효한다.
‘다 죽었어’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문득 부끄러워진다. 주변에서는 마치 ‘금덩이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보니 똥이네’하는 표정이다. 아무리 원인이 밖에 있어도 화를 내는 순간, 공범이 된다.
도대체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손해를 봐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행위로 피해를 입어서. 상대만 운이 좋은 것 같아서. 되는 일이 없어서. 무시당해서. 내가 악착같이 모은 작디작은 인내들이 한계에 봉착해서 등등.
화가 난 이유와 화를 낸 이유는 같은 것처럼 보인다. ‘화가 나니까 화를 내지’ 당연한 명제일까?
화가 나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화가 나지 않아도 화를 낼 수 없는가? 화가 안 나면 화를 낼 일이 없어 보이긴 한다.
자, 곱씹어보자.
화가 나니까 화를 내지. 화를 내니까 화가 나지. 화가 나니까 화를 더 내지. 더 화를 내니까 화가 더 나지…
어느새 무한 루프에 갇힌다.
독감도 예방이 중요하듯, 화가 날 것 같으면 초기에 이성을 잡아야 한다는 이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2000여 년 전 세네카는 이미 동생 노바투스의 부탁으로 고민했다. <화에 대하여>
이런 제목의 책은 어지간한 지력이나 철학적 내공이 아니면 쉽게 쓰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화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닌가.
이 위대한 철학자의, 한마디로 ‘후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책은 바로 지금도 메아리 퍼져 들려온다.
마치 유효기간 따위는 없다는 듯.
짧게 요약하면, 화에 대한 노바투스의 두 가지 질문과 답이다.
첫째, 화란 무엇인가.
화는 “고통을 고통으로 갚아주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다. p35
무엇에 화가 나는지 되돌아 훑어보라. 화는 순간의 광기일 뿐, 네가 하찮은 일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근거다.
화에게는 원인이 어디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가장 사소한 것에서 출발해서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p159
둘째, 화는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는가.
화에 대한 최고의 치유책은 유예와 숨김이다. 즉 기다리고, 숨겨라. 분명 고통스럽겠지만 잠시만 그리하면 곧 누그러진다.
아니면, 조금 뒤로 물러나서 껄껄 웃어라! p237
그리고 진심을 담아 조언한다.
화를 내며 보내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짧은가! p243
한때는,
멀티태스킹, 조급함, 욱! 하기.
한국 성인이라면 누구나 갖는 직장인 증상으로 여겼다. 지금은 성인 ADHD 판정을 받고 약을 먹고 있다. ‘혹시’다 싶으면, 정신의학과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착각하지 말고
같이 미쳐가지 말고
짧은 인생, 정상적으로 즐기며 살아보자.
적어도 나를 화나게 할 수 있는 원인이 가까이 오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