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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Aug 18. 2024

차라리 오멜라스가 나을지도

바람의 열두 방향(어슐러 K. 르 귄/최용준 옮김)

강의를 듣던 중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접했다. 인간 본성을 다룬 소설이자 ‘속죄양’의 예로서, 일부 발췌된 내용만으로도 강한 호기심을 일으켰다. 찾아보니, <<바람의 열두 방향>>이라는 단편 모음집 안에 있는 17개 소설 중 하나였다. 어슐러 K. 르 귄이라는 작가는 SF와 판타지의 거장이었지만 내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접한 단 13페이지의 단편 소설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17가지 단편은 판타지, SF로 크게 분류할 수 있고 SF는 다시 시간여행, 하드 SF, 소프트 SF, 유토피아 등을 골고루 포함하고 있다. 이 중 내게 3편이 특별히 인상 깊었다.


<명인들>과 <땅속의 별들>은 전혀 생각본 적 없는 주제를 다룬다. 신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한 과학자(명인, 천문학자)가 자연의 원리를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상황에 처할 수 있는지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왕과 교황, 신부 등 기득권이 백성들을 재판하거나 위로할 수 있는 권위는 바로 신을 등에 업기 때문이다. 신이 지명하여 대리권을 부여한 자임을 자칭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이때, 신을 부정할지 모르는 과학의 도전은 배신을 넘어 극악무도한 자객, 암살행위와 다름없다. 따라서, 인간 세계의 규칙과 조화를 파괴하는 행위이기에 서슴없이 화형도 불사한다.

0의 존재를 알고, 덧셈을 알고 무리수를 알고 차원을 좌표로 옮겨 수치로 바꾸고, 고차 방정식의 해를 풀고, 집합과 매트릭스 연산을 하고, 확률 방정식을 도출하기까지 인간의 사고는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를 끝없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숫자로 드러냈다. 과학은 수학으로 표현한다. 그래야 예측 가능하다. 티코 브라헤가 천리안으로 별의 움직임을 기록하였지만, 행성의 움직임을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한 자는 멸시받던 케플러다.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부인한 이유로 여생을 갇혀 보낸다. 갈레노스의 해부학으로 천년 간 유린된 의학계는 엉뚱한 약과 사혈법으로 수많은 사람의 병세를 악화시켰고, 16세기 베살리우스 덕분에 근대 해부학이 개화했다. 갈레노스의 위상에 대항한 베살리우스는 적잖이 고생했다.

‘무’에 대한 두려움이 ‘신’을 만들어냈듯, ‘무’에 대한 도전이 ‘과학’을 이끌어냈고 오늘날은 과학의 위상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과학이 밝히지 못한 부분을 그레이존으로 남기고, 신의 영역이라 부를지라도 과학은 많은 부분을 환하게 밝혔다.

신의 세상에서 과학의 세상으로 넘어오기 시작한 500년 전의 과학자들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그러나, 신과 그 대리인들의 권위가 압도적인 시대에 살던 과학자들은 어땠을까. 새로운 자연 현상을 목도하고는 신의 섭리에서 벗어났다며 신을 부정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명인들>과 <땅속의 별들>은 꽤나 핍진성이 있는 전개와 결말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호기심의 대가는 가벼워졌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명작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 <<바람의 열두 방향>>에는 각 단편소설 앞에 저자의 설명이 실려 있는데, 재밌는 사실은 ‘오멜라스’가 도로 표지판에서 빌려온 단어라는 것이다. 그것도 ‘살렘(오리건) Salem(Oregon)’을 거꾸로 읽어서 ‘오멜라스’로 지었단다. 살렘은 평화인데, 거꾸로 읽어 멜라스. 오 멜라스! 위트가 넘친다고 해야 할까. 글을 읽으면 저자의 즉흥적이지만 날카로운 영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유토피아와 같은 도시 오멜라스, 바닷가에 눈부시게 우뚝 선 도시에서는 여름 축제가 한창이다. 맑고 순수하며 영롱하고 밝은 영혼들의 도시를 독자 마음대로 상상하면 족하리라. <<멋진 신세계>>의 ‘소마’처럼 오멜라스에서는 언제든 ‘드루즈’의 달콤한 향기로 맡으며 활홀경을 느낄 수 있다. 소마처럼 중독성도 없는 기쁨의 비약이다.

그런데, 어느 한 지하실에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 하나가 갇혀있다. 가로 두 걸음, 세로 세 걸음의 작고 악취 나는 공간에서 옥수수 가루와 기름 반 그릇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오멜라스 사람들은 그 존재를 알고 있다. 그 존재를 알았을 때, 연민을 느끼며 괴로워하거나, 묵인하거나, 떠난다. 오멜라스의 영광은 아이의 감금을 담보로 한다.


단 한 가지 사소한 개선을 위해 오멜라스에 사는 모든 이들이 누리는 멋지고 고상한 삶을 맞바꾸어야만 한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기 위해 수천 명의 행복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하실 골방 안에서 벌어지는 죄악을 방기 하게 만드는 이유다. p465     


오히려 아이의 존재를 잊지 않고 상기함으로써 지금의 행복과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아이를 보고 떠난 자들도 있다. 그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갇힌 건 누구인가? 이 세상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 한 번 자문해 보자. 역사를 돌이켜봐도 현대의 지구촌 곳곳을 봐도 마치 행불행은 제로섬처럼 보인다. 지금 내가 행복하고 여유롭다면 누군가는 불행하고 궁핍한 것. 이분법의 모든 대상은 ‘누리는 사람들’과 ‘갇힌 아이’로 구별될지 모르겠다.

갇힌 아이가 한 명이면 다행일까? 내가 보기에 오멜라스는 극단적 공리주의 세상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내게 충격과 함께, 주위를 둘러보라고 소리쳤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늘 그랬듯, 투표를 통해 다수결이라는 양날의 검을 휘둘렀다. 99:1인 경우, 차라리 오멜라스가 재현될지 모른다. 그러나 드물다.

민주주의를 선택한 이상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우리는 51:49로 한쪽을 결정하되 100의 권력을 주었다. 49는 하릴없이 목놓아 운다. 51중 다수도 낯선 전개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지금 이 나라는 누구를 가두고 누가 누리고 있는가.

부디, 되도록 많은 사람이 누렸으면 하는 간절함 뿐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아이를 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과연, 모두가 묵인하고 이용하는 상황에서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 있었을까.

그렇게 때늦은 각성자들-의인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은 홀로 떠난다. 한 명씩, 한 명씩..

하.. 대한민국이여 정녕 안녕한가.


문학작품 읽다가 웬 뚱딴지냐 싶지만,

차라리 오멜라스가 낫다는 생각에 한숨을 막을 방도가 없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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