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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Aug 29. 2023

문과를 넘어 이과로, 이과를 넘어 무의미로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고

30년 넘게 과학 책이라고는 읽지 않았던 ‘운명적 문과’가, 글로 쓴 ‘과학을 소재로 한 인문학 잡담’이다. 문과족 작가가 스스로를 ‘거만한 바보’로 낮추며 과학의 가치를 재평가하려는 시도는 참신하며, 나처럼 ‘이과 남자로 문과 공부’를 하는 이에게 꽤나 흥미로운 접근이다.


왜 과학을 알려고 하지 않는가? 한마디로, ‘사는데 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인문학은 사는데 필수인가? 그렇다고 믿는 듯하다.


왜 과학 책은 팔리지 않는가? 놀라운 점은 이공계조차 과학 책을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른의 조건』에서는 도쿄대 문과생과 이과생이 참여하는 후기 교양과목을 개설하여,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토론 내용을 다루었다. 각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을 발판으로 삼되, 서로 간의 장벽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대학교에서 당장 실현가능한, 사회 문제의 해결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통섭적 교육 방법을 제시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어른의 조건』이 문이과가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며 서로의 관점을 조율하는 과정이었다면,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문이과가 서로를 직접 바라보도록 한다.


이 책은 먼저, 인문학자로부터 과학이 외면당하는 현실을 짚어본 후, 나는 무엇인가(뇌과학),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생물학),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물리학), 그리고, 사유 방법 중 하나가 된 환원주의(화학)와 이과의 천상계(수학)를 하나씩 ‘문과’의 눈으로 이해하고 바라본다.


저자의 말처럼, ‘질문은 과학적으로 하되 그 대답은 인문학으로’ 해도 좋고, 역으로 인문학적 질문에 과학적으로 대답을 해도 좋다. ‘나는 누구인가?’를 ‘나는 무엇인가?’로 바꾸어 질문해 보는 것만으로도 출간목적 달성이다. ‘관점의 다변화’ 역시 이 책의 주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짬뽕을 강요할 수 없듯이 문과에게 과학을 강요할 수도 없고, 이과에게 인문학을 강요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짬뽕 한 번 먹어보는 것은 약간의 열린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즉, 새로운 자극의 수용은 약간의 열린 마음이면 충분하다. 이를 시작으로 나를 둘러싼 세상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고, 반대로 ‘나’를 이해하는 기회가 될 터다.

저자의 견해는 여기까지다.


뒤이은, 저자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게 느슨해 보인다.

‘인생은 각자 책임지는 것이다. 좋으면 가까이, 싫으면 멀리, 그렇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p92

한 인간으로서 열역학 제2법칙의 저항인자가 될지, 우물 안 개구리가 될지, 염세주의자가 될지의 선택은 당연히 자신의 몫이다. 나한테 책임을 묻지 말라.


단도직입적으로 문과를 넘어 이과를 섭렵 또는 포용하면 내 삶의 무엇이 달라질까? 저자는 삶의 태도 하나를 건져낸 듯하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요, 누가 뭐라든 나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증명할 수 없으니 ‘아님 말고’ 식으로 나만의 견해도 정리해 본다.

유전자는 자신의 지속만을 목적으로 할 뿐, 특정 종에게 유리한 특질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인간 따위 관심 없다. 유전자를 포함하여 지구 위 모든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우연한 조합으로 인간이란 유기체가 만들어졌을 뿐이다. 존재 이유나 목적은? ‘없다’에 가깝게 ‘모른다’. 인간은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두고 싶지만, 알면 알수록 그렇지 않다. 과찬하면, 지구라는 무대에서 무게감 있는 조연일 뿐이다. 오히려 개체수 관점에서 미생물, 바퀴벌레, 쥐가 주인공이다.

‘유전자’를 이기적이라고 의인화한 것은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역설적으로, 이타성의 근거가 있을 것이란 희망도 버리지 않는다.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의 정보는 왜곡되거나 일부일 뿐이므로, 상상의 나래를 통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완할 뿐이다. 불완전하고 이기적 유기체로서의 숙명을 이해하면, 나란 존재는 한없이 작아진다.

어쩌면, 엔트로피의 평형상태 도달을 늦추는 것이야말로 ‘정신’을 갖는 인간 종의 저항이자 삶의 의미일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자부(또는 자만)와 호기심을 갖는 ‘인간’은 지구에서 발생한 우주의 돌연변이가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의 규칙성에 기여하는 것이 어떤가. 함께 웃을 수 있고, 적어도 내 기분이 좋아질 테니. 뭐, 그렇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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