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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Aug 16. 2017

친구를 추모하며

하지 못한 이야기

형의 장례식에 딱 하루 있었다. 어렸던 나는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그것도 나의 부모님이, 할머니가, 친구들이 우는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웠다. 셋째 날에는 영정 사진을 들고 형이 누울 장소로 걸어야 한단다. 아빠는 형의 마지막 길을 앞장서 달라고 했다. 그게 마땅히 내 일이었다는 것은 조금 더 커서야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그 장소에 있기 싫었다. 형이 없다는 게 실감도 나지 않아서, 영웅 같았던 어른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워서.


더 찢어질 부모님의 마음도 모르고 떼를 썼다. 결국 형의 빈소를 하루만 지키고 부산에 있는 외삼촌댁에서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지냈다. 그래서 형의 발인을 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도 후회없었다. 오히려 머리가 클수록 그런 절차를 꼭 지나야 했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발인을 해야 형을 떠나보내줄 수 있는 거라고 병원이나 상조회사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몸이 떠난다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작별이 아니다. 그들이 이 마음을 알리가 없다.


형은 그 날 이후에도 항상 우리와 함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까이 왔다. 떠나보냈다는 상실감은 마음으로써, 느낌으로써, 바람으로써 다시 채워졌다. 내가 대학에 붙은 날에도, 제대를 했던 날에도, 취업에 성공한 날에도, 실패를 겪었을 때도 언제나 형이 있었다. 갈수록 그날의 기억은 아프지 않게 됐을 뿐 아니라 가족을 다시 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 형의 기일이나 생일에는 산소로 찾아가 우리의 근황을 전했고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화창한 날씨로, 시원한 바람으로 형은 대답했다.


-


작년 가을, 대학 1학년 때 과대를 맡았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영국에 유학가 있던 대학 동기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급성 심근경색이란다. 아무 생각도 대답도 할 수 없어 자취방에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발인을 함께했다. 그곳에서, 나는 보지 못했던, 아들을 보내야 하는 가족을 봤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떠올렸다. 형의 발인날 우리 부모님도 저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저렇게 통곡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치미는 슬픔을 억누르고 아들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친구들을 챙겨줬을 것이다. 친척 형 누나들도 저렇게 형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을 것이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다시는 겪을 수도 없는 슬픔에 빠진 그의 가족들에게 나도 겪어봤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가족도 세상이 무너졌는 줄 알았다고, 발인날 모든 걸 보내야 하는 줄 알았고,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게 너무나 괴로워서 한동안 눈물로 지냈다고. 그런데 끝 아니라고. 곧 돌아와서 함께할 거라고. 언젠가는 슬픔보다 힘이 될 거라고. 마음으로써, 느낌으로써, 바람으로써.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아무 말도 못 했었다. 생전에 그에게 좋은 친구는 아니었다는 생각 등이 내 입을 막았다. 그 머뭇거림은 후회로 남았다. 이후 마음 한켠에는 쭉 친구와 가족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그의 가족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벌써 1년 가까이 지나버린 세월에, 기어코 가는 시간에 야속해하고 있진 않을까. 친구는 다시 가족의 곁으로 돌아왔을까. 가족도 그걸 느끼고 있을까.


오늘은 그의 생일이다. 알림에 다시 떠오른 생각을 이렇게라도 내보인다. 쓰기 시작한 후로 매번 느꼈던 글의 힘을 다시 한 번 기대하며.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미약하게나마 어루만질 수 있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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