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늘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두부 Feb 13. 2018

숙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나에겐 어려운

오래된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선명한 것이 몇 가지 있다. 이를테면 12살 때 앞에 나와 발표를 하는데 내 말 더듬에 누군가의 웃음이 터져버린 일. 그 웃음이 교실에 있던 모두에게 전염됐던 일. 당시에는 어떤 느낌도 받지 않았지만 기억은 성인이 될 때까지도 남았다. 어쩌면 그때 나는 상처를 받았으나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고, 마음 한 구석에 흉터로 남아 쭉 존재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에너지를 더 써야 했다. 보통 사람들은 전혀 힘쓰지 않는 일 앞에서도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으니까. 영화 <킹스 스피치>를 보면 말 더듬을 고치려는 조지 6세가 국민 체조 같은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하며 말 연습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볍게 보이며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말을 더듬는 사람들은 진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과장된 동작은 갇혀있던 말이 나오도록 돕는다. 실제로 높이뛰기 선수처럼 발을 땅에 내려 찍은 뒤 살짝 몸을 띄우는 동시에 말을 하면 어떻게 해도 안 나오던 소리가 나오곤 했다. 그 모습이 스스로도 바보 같았다. 말을 끝내 못 하는 것과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 중에 어떤 게 덜 바보 같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가늠해보기도 했다. 창 밖의 저 많은 사람 중에서도 한 명 있을까 말까 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서글펐다.


시간이 흘러 스물네 살이 되었을 즈음 말 더듬은 없어졌다. 그토록 오랜 시간 날 괴롭혔던 게 어떻게 없어졌는지 나조차 잘 모른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나아지다가 돌아보니 없었다. 언어 치료를 그렇게 받아도 나아지지 않던 것이 말이다. 말 더듬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길거리 인터뷰에도 도전하며 한켠에 남아있던 두려움마저 극복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말 더듬이가 아니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실감한 날을 기억한다. 정말 기뻤다. 지난 다친 기억을 되뇌어도 아프지 않을 수 있다니.


그리고 그 이후부터 나는 종종 말을 더듬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곤 했다. "저 사실, 예전에 말을 많이 더듬었어요."라는 식이다. 같은 내용으로 글도 썼다. 누군가가 숨겨둔 상처가 있나요?라고 물은 것도 아니고 말 더듬이 다시 튀어나와 설명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왜 굳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혹은 하고 싶었는지 나도 잘 모른다.


얼마 전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행 끝자락에 프리랜서 일거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난데없는 방황을 했기에 그 제안은 엄청난 안도감도 줬다. 갈 곳을 잃었는데 기댈 곳이 먼저 찾아왔으니까.


귀국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미팅이 잡혔다. 약속시간에 맞춰 찾아가 낮고 오래된 회사 건물 앞에서 기다렸다. 3분 정도가 지나 만나기로 한 이사님이 나왔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이사님은 집이 어디냐 물었다. 집을 말하니 아이고, 그럼 오는데 고생하셨겠네요, 라고 했다. 나는 저희 집이 멀어 보이지만 교통이 좋아서 생각보다 금방 와요, 하고 대답했다. 이사님은 여행은 어땠냐고 했다. 나는 사실 즐겁기만 했던 여행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말 잘 하는데요?"

갑자기 이사님이 말했다.

"네?"

"하나도 안 더듬네요."

"아, 네."

나는 어떤 웃음도 없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가 예전에 말 더듬에 대해 썼던 글을 보신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두려움과 가까운 감정이었다. 마음 편하게 생각했던 미팅이었는데 갑자기 긴장이 됐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손에 땀이 쥐어졌다. 한창 말을 더듬었을 때 중요한 자리에서 말을 해야 할 때마다 느꼈던 기분과 같았다. 다행히도 미팅은 무사히 마쳤다. 불안했지만 말을 더듬지는 않았다. 겉으로 드러날만한 실수도 없었다. 하지만 혼자서 버스를 탈 때까지 초조한 기분은 계속됐다.


버스에서 12살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생각이 나서 더 생각해보니 교실에서 한바탕 벌어졌던 웃음은 이상할 만큼 빠르게 멈췄었다. 그 웃음에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만큼 당황했었고 그가 바로 웃음을 잠재웠다. 고등학교 친구 앞에서 말을 더듬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 친구는 내가 말이 안 나와 스스로 답답해하고 있을 때마다 미소를 지으면서 괜찮아, 천천히. 하고 말했다. 대학 면접장에서 15초 동안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아빠 같은 표정으로 종이를 건네며 말하기 힘들다면 글로 써 볼래?라고 말했던 면접관님도 생각났다. 대학교 1학년 때 내가 없는 술자리에서 동기들에게 나 말 더듬는 거 보고 웃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던 부과대도 기억났다. 나는 그게 동정이었든 무엇이었든 상관없었다.


여전히 내 인생에는 말 더듬이였던 날이 아닌 날보다 많다. 그래서인지 내 몸은 여전히 그때의 따뜻함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말 더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그걸 알게 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직도 그 날에 사는 건 나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을 한 권도 못 판 서점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