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쿤까지 가는 길
기분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곤 한다. 내가 설레면 세상도 설레는 듯하고, 내가 걱정하면 세상도 걱정하는 것 같다. 어느 쪽으로든 기분이 치우쳐 있을 때면 나는 항상 그랬다.
당연하게도, 세계여행을 떠나는 날의 세상은 싱숭생숭했다. 발걸음마다 따라왔던 부모님의 챙김도,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동네의 분위기도 낯설었다.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서는 순간 이미 마주한 적 없던 여정이 시작된 듯했다. 결코 신나는 기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나댔고 부담감이 생각을 짓눌렀다.
팀은 멕시코 칸쿤에 있었다. 미국 댈러스로 가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칸쿤으로 가면 되었다. 공항에서 어머니와 잠깐의 이별을 위한 인사를 나누고 댈러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좌석은 창가 쪽 세 자리 중 가운데인 B였다. 자리를 찾아 가보니 키가 195는 되어 보이는 흑인과 185는 되어 보이는 동남아인 사이였다. 나도 덩치가 큰 편이다. 바리바리 들고 온 놀거리들이 거추장스러워졌다. 팔걸이 너머로 어깨가 넘어와 똑바로 앉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렇게 생각이 복잡한 날은 몸이라도 편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내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비행기라면 당연히 설렘에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아기의 울음에 민감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통로를 지나다가 부딪히는 이에겐 눈인사 대신 무심히 고쳐 앉는 자세만이 있었을 뿐이다. 댈러스는 휴양지도 아니고, 관광 명소가 모여있는 곳도 아니다. 이 도시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거나, 비즈니스 계약을 따야 하거나, 공부하러 가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댈러스행 비행기는 무거웠다.
안 그래도 온 세상이 불안한 내게 무거운 분위기는 어려웠다. 한시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어떻게 이 긴 여행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흔하디 흔한 여행기와는 다른 색을 어떻게 낼 수 있을까, 어떤 조직에도 처음에는 잘 융화되지 못하는 내가 이번에는 다를 수 있을까 따위의 걱정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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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스 숙소에서 하루를 보낸 뒤, 칸쿤으로 떠나기 위해 공항을 찾았다. 기분은 다르지 않았다. 멕시코의 문턱까지 오며 생각에만 머물러있던 것들을 구체화하려 했지만 실제로 짊어져야 할 짐이 실감도 안 나다 보니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작이 가까워질수록 긴장과 걱정은 커졌다.
칸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이 비행기에서는 모두가 웃고 있었다. 어떤 미국인들은 춤을 추기도 했다. 들떠있었고 즐거움이 가득했다. 통로에서 부딪힘이 생겨도 괜찮다는 눈인사가 오고 갔다. 옆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움츠리지 않았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으니 다 같이 즐거움을 나누자고 말하는 듯 했다. 칸쿤은 신혼여행지다. 비즈니스나 공부가 아니라 휴식을 위해 오는 곳이다. 그래서 이렇게 여유로운 건가, 그래서 댈러스로 향하던 비행기와는 느낌이 다른 건가 싶었다. 자리도 이전에 탔던 비행기만큼 비좁았지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시는 그곳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비슷한 기분을 가진 사람들을 태운다. 댈러스와 칸쿤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도시이기에 두 비행기도 완전히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 비행기에서 나는 첫 번째 비행기를 떠올렸다. 완전히 달랐던 그 비행기를. 칸쿤행 비행기에 탈 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지만, 여유와 흥이 넘치는 분위기에 가벼워졌고, 그제야 댈러스행 비행기의 분위기를 기억할 수 있었다. 긍정적인 분위기가 기분에 묶여있던 생각을 풀어준 것이다.
나는 세계를 다니면서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큰 다채로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줄 알아야 한다. 도시마다 지닌 느낌이 다르고, 비행기마다 가진 느낌이 다르다. 하물며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다양할까. 하지만 기분에 따라 세상을 바꿔버리면 그 다양함을 놓치기 쉽다. 눈 앞에 지나가는 소중한 시선과 이야기를 지나쳐버리고 만다. 관찰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업인 내가 칸쿤행 비행기의 공기가 내 기분을 풀어주기 전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었다. 가벼움을 극복해야 한다. 기분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가져야 한다. 기분과 세상을 분리시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그제서야 주어진 것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땅에 서있어도 하늘의 비행기를 보며 저 비행기는 어떤 분위기를 담고 있을까, 라는 재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그 생각에 닿자 기분이 좋아졌다. 창밖으로 칸쿤의 에메랄드 빛 바다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