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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Oct 23. 2021

말 더듬는 인터뷰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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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1일 밤, 다섯 살 터울의 형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이 뒤집혔다. 나는 한동안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다. 친척들은 돌아가며 나를 돌봤다. 버거울 만큼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거실을 눌렀다.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설명했다. 짧은 몇 마디 사이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면서. 어렸지만 알 수 있었다. 다신 형을 보지 못 하는구나.


겨우 열 살이었지만 모든 기억이 선명하다. 장례식장에 갈 때 탔던 모범택시, 향 냄새, 오열하던 할머니,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운 아빠, 영정 사진 앞에 놓인 형 친구들의 편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짓던 친구들, 어른들.


나는 그날의 충격으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슬픔을 아무 이상 없이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말 더듬은 우리 가족이 일상을 되찾고 나서도 여전했다. 성인이 되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그대로였다. 내 밥벌이를 시작하고 나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흉터처럼 남아 날 괴롭혔다. 


말 더듬는 사람을 만나본 적 있는지? 좀 떠는 수준이 아니라 입을 떼기도 어려워하는 사람. "안녕하세요" 한 마디를 하는데 '안'이라는 첫마디부터 막히는 사람. 대충 이런 식이다. “...ㅇ..아..아…아아아..안, 안- 아 안녕하세요”


말 더듬이 야속한 게 언제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다. 긴장이 심할 때만 나온다거나 하면 대처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 발표를 할 때도 친구와 수다를 떨 때도 갑자기 튀어나온다. 말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표정이나 몸짓으로 드러난다. 얼굴을 찌푸리거나 심할 때는 몸을 배배 꼬기도 한다. 머릿속에 있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위해 온몸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늘 상대의 난감한 표정을 마주해야 했다. 별 것도 아닌 말을 듣기 위해 5초는 잠자코 -상대가 편치 않은 모습으로 애쓰는 걸 바라보면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은 난감할 수밖에 없다. 난감해하는 사람 앞에 서는 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해주는 부모님 앞에서도 나는, 말이 안 나오는 순간 머리가 캄캄해졌다. 말 더듬을 멈추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할 말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얘기했다. 늘 내게 일어난 일들이나 기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형의 사고나 말 더듬이 시작된 순간, 말이 안 나온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그로 인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최대한 많은 사람이 알아줬으면 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말을 더듬는 모습 하나로만 기억하는 게 싫었다. 말 더듬은 숨길 수 없고 눈에 띄기 때문에 나는 너무 쉽게 '말 더듬이'로 정의 내려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나에 대해 말한다면 "그 말 더듬는 사람 있잖아"라고 말하지 않을까. 막을 수 없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으면 했다. 나라는 사람이 단어 하나로 설명된다는 건 억울한 일이니까. 나는 그보다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말 더듬이에게 으레 가질 수 있는 편견에 반대되는 성격이나 취향,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말 더듬이라는 껍데기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껍데기 속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건 서사, 즉 이야기였다. 말 더듬이라는 현상에 서사가 부여되는 순간 보이지 않던 너머의 사람이 보이게 될 거라 생각했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겉모습을 표현하는 단어 하나보다 훨씬 나를 잘 설명한다고 믿었다. 형이 보고 싶을 때면 보고 싶다고 숨기지 않고 말했다. 말 더듬이 특히 심해질 땐 요즘 너무 심해졌는데 아마도 이런 이유 같다고 먼저 말했다.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마다 훨씬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됐다고 실감했다.


길거리 인터뷰어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을 때 가슴이 뛴 건 그래서였지 않나 싶다. SNS에서 이름 있던 길거리 인터뷰 프로젝트 팀에서 인터뷰어를 뽑는다는 포스팅을 올렸는데 그걸 보는 순간 낯설 만큼 심장이 떨렸다. 너무나 인터뷰어가 되고 싶었다. 지원용 인터뷰를 내기 위해 카페 옆자리에 있던 부부에게 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 땀이 뻘뻘 났다. 말도 평소보다 더 더듬었다. 난 개의치 않았다. 너무나 하고 싶었다.


이후 6년째 나는 주말이면 길거리에 나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다. 100명 가까이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사람이 고유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겉모습으로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았다.


열 살부터 22년간의 내 삶은 말 더듬이에서 인터뷰어로 바뀌어가는 과정이었다. 말 더듬이라는 이름을 간절하게 떼내고 싶었다. 그보다 나를 더 잘 설명하는 이름을 찾고 싶었고 6년 전 인터뷰어라는 근사한 단어를 만났다. 나는 여전히 말을 더듬지만 이제 말 더듬은 나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계속 작아져왔고 앞으로도 작아질 것이다. 그 과정에 대해 쓰려고 한다.


언젠가 <말 더듬, 고칠 수 있다!> 류의 책을 읽은 적 있다. 첫 장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말을 더듬는 사람의 고통은 이루 말하기 힘들고 헤아리기도 어렵다. 일상의 모든 부분이 어려우니 늘 좌절하고 고통받는다. 사회에서 도태되는 경우도 흔하다. 자살을 하거나 집에 은둔하는 등의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물론 말 더듬이의 삶은 어렵다. 하지만 말 더듬으로 인한 어려움 만으로 그들의 삶을 설명할 수는 없다. 말을 더듬는 사람 100명이 있으면 100가지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스토리가 없는 사람은 없다.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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