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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Nov 29. 2021

11월 29일 월요일

이사를 했습니다

1. 원룸

결혼 첫 해 원룸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만 30세를 약 4개월 앞뒀던 여름이었고 우리는 호기롭게 영국 워킹홀리데이를 준비 중이었다. 나는 입사 4년 차였지만 승진이나 다른 떡밥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기회를 잡고 싶었다. 영국 워킹홀리데이는 2년인 데다 현지 1년짜리 석사 학위도 꽤 인기가 있어 계획과 의지가 충분했다.


워킹홀리데이는 떨어졌고 원룸에서의 생활도 곧 마감됐다. 4개월 간 그저 신혼의 단꿈에 젖어 치고받고 던지는 부부싸움은 없었으므로(물론 지금도 딱히 있진 않지만) 원룸에서의 삶은 꽤 즐거웠다. 그리고 4년 만에 우리는 다시 원룸으로 들어갔다. 이사와 이사 사이 짧은 기간이지만 짐을 풀고 부엌 곁의 식탁 옆의 침대에서 자려니 조금 답답한 것 같았다. 그러기엔 아주 단잠을 잤던 지난밤.


강남 한복판에 숙소를 잡고 그간 먹어보고 싶었던. 정확히는 집에서 편하게 배달시켜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점들을 한참 훑었다. 먹는 것에 진심인 우리 부부가 먹는 것에 소홀해지기 시작한 한 달 전부터 인생의 큰 즐거움을 잃은 기분이었는데 하루 만에 극복. 젠제로 젤라또와 대치동 꽈배기 그리고 키토식이 가능할 법한 계란 잔뜩 김밥을 먹었다. 오늘은 미아논나 바게떼리아에서 샌드위치를 사다 먹기로 했다! 앞으로 2주간 뭘 먹을지 벌써 너무 신이 난다.


2. 이사

이사를 앞두고 나를 괴롭히는 것들 중 가장 큰 건 역시 ‘애벌 짐 싸기’인데. 수건부터 속옷까지 세탁해서 햇볕에 잘 말리고 그것들 깨끗한 파우치에 담아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는 것을 말한다. 이사 가자마자 그 먼지 구덩이에서 씻고 자는 것만이라도 깔끔하게 정돈된 환경에서 하고 싶어서.


이번 이사는 중간 기간에 입고 쓸 옷들과 각종 생활 용품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쓰다 남은 화장품과 샘플들을 챙기고 그 와중에 패딩과 코트 그리고 플랫슈즈부터 어그까지 다양하게도 챙겼다. 매일 나오는 속옷과 양말 빨래를 위한 세제, 처음 뵙는 세탁기 님을 청소할 과탄산소다도 챙겼다. 어떤 향수를 뿌리게 될지 몰라 향수 6종(여기서부터 미치기 시작했는데) 그리고 이불과 베개 심지어 잠자리에 두고 자는 애착 인형도 챙겼다. 인형을 보자마자 남편이 “이것도 챙겨 왔어?”라 물었다. 이것밖에 안 챙긴 거란다.


컨테이너에서 돌아  짐들을 풀고 정리하고 세탁할 2 후의 . 고생하렴. 그래도 2주나 되는데  살아야 되지 않겠니.


3. 상담

휴직, 퇴사, 이직, 임신, 유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나의 슬픔들. 단 하나의 일도 나에게 작지 않았고 단 하나의 일도 나에게 쉬이 넘어가지 않아서 상담을 시작했다. 오늘 마지막 3번째 상담을 마치고 조금 울었다.


엄마는 내가 상담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어떤 곳에도 적을 두지 말고 훌훌 털어버리라고 했다. 엄마의 속상한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남는다. 첫 상담을 받고 상담사님도 같은 말을 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일정 기간은 조금 더 버텨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기간을 꼬닥꼬닥 보내고 있을 뿐이고.


나에게 이직은 사실 돌파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곳을 바라보며 막연한 기대와 동경을 갖고 있던 조직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에게 돌파구일 뿐인 이곳이 누군가에게 꿈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아이러니했다. 대외적인 인정과 대내적인 불안정이 공존하는 상황이랄까.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날 가장 흔들리게 만든 건 이전 회사에서 쌓아온 단단한 결속과 연대가 사라진 것. 이토록 관계지향적인 사람이었다니. 다만 적응하지 않고 뻗댈수록 나의 불안정이 좀 더 심해지고 있을 뿐이라는 걸 인정했다. 적응하고 받아들이니 조금 나아졌다. 아주 조금씩.


회사를 그만두면 나아지겠지라는 마음을 언제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이 나를 괴롭히겠지라는 마음도 잊지 않고 있다. 햇살을 받으며 끝없는 여유를 부리며 커피숍을 전전하고 세상의 온갖 일에 간섭하면서 사실은 하릴없이 저녁을 기다리는 삶, 생각보다 힘들더라고. 난 생산적으로 굴며 적당한 피로와 보람에 사로잡혀 잠드는 게 좋더라고.


지난 몇 달간 나는 상담사님의 무조건적인 동의와 온화한 눈빛에 많은 치유를 받았다. 상담사님은 그저 매번 나를 더 아끼라고 했다. 나는 내가 돌봐야 한다고 했다. 남편을 생각하고 엄마를 생각해도 언제나 내가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마음이 힘든 날 어디든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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