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첫 만남
오늘의 마음과 생각을 너무 늦지 않게 남겨두고 싶다. 생생한 기억으로 남겨둘 수 있을 때에.
이렇게 힘빼고 준비했던 3월 첫 날은 없었다. 처음으로 맡게 된 부장 자리에 마음의 힘을 다 쓰느라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 쓸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개학 전 날 밤이 되어서야 대충의 하루 흐름만 구상해두고 출근했다. 그렇다고 의연하고 무덤덤하진 못했다. 정말 내일이 개학이라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난다고?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잠자리에 들었으니까.
일찍 출근해서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할 여유없이 딱 맞춰 도착한 교실 문 앞엔 먼저 온 아이 한 명이 있었다. 당황하지 않고 문을 열고 이틀 전 출근일에 적어 둔 '교실에 들어와서 해야할 일' 목록이 적힌 화이트보드를 말없이 가리켰다. '3월에는 웃지도 말아라.' '첫 날에 꽉 잡아야 1년이 편하다' 는 선배들의 구닥다리 충고들이 여전히 나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환한 미소와 나긋한 목소리로 첫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과 굳은 눈빛과 경직된 목소리 사이에서 마음이 갈팡질팡한다. 일관성 없는 태도가 나오기 시작한다. 농담을 던지며 벽을 확 낮췄다가 다나까 체로 군기를 잡으며 다중이가 되고만다. 아이들을 어떤 온도로 대해야할지는 여전히 고민이다. 아이들을 나와 같은 인격으로, 수평적으로 만나며 관계 맺어야한다는 이상을 따라가다보면 어린 나이에 이미 약육강식의 질서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잡아먹히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본디 성정에 군기 잡는 카리스마는 없는 나인지라 아이들은 벌써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 낌새가 조금씩 보였다. 첫 날 부터 웅성거리고 떠드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렇다고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숨막혀하면서.. Happy noise의 적정선은 어느 정도일까..) 유난히 목소리가 큰 까불이 친구들이 많은 올해의 우리 반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은 자제할 것과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진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고 기다리는 법은 가르쳐줘야겠다. 까불이 친구들. 우리, 적이 되지 말고 같은 편 하자. 일년 동안 계속.
아이들이 그림처럼 앉아있고,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한 교실을 '잘 잡힌 교실' 이라고 하고, 그런 교실이 좋은 교실이라고도 한다. 그게 좋은 교실인지는 의문이 들지만, 나도 '잘 잡힌' 교실을 만들어야한다는 부담이 없진 않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얼마나 기특한가. 내가 뭐라고, 생전 처음 본 어른이 하라는 대로 자리에 앉고, 한 줄을 섰다가 두 줄을 서고, 보라고 하면 보고, 적으라면 적고, 그리라면 그리는지. 내가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인지. 암만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들과 나의 위계질서에서 우위에 있는 것은 나다. 이 힘을 남용하며 아이들을 다스리려 하지 않고 싶다. 눈 맞추며 함께 걷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오늘 우리 반은 '팀'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위험하다' (죽는다는 너무 과격해보여서 수위 조절을 살짝 했다.)라는 말도 몇 번 했다..ㅎ 공동체에 진심인 선생님과 보낸 1년 후에, 아이들이 함께함의 즐거움을 알았으면, '오히려 좋아' 가 올해의 좌우명인 선생님과 보낸 1년 후에, 아이들에게 긍정과 감사가 배어있었으면, 독촉 메시지가 몇 번이나 오는 게으른 작가인 선생님과 보낸 1년 후에, 아이들이 읽고 쓰기를 조금이나마 즐길 수 있었으면. 무엇보다 내 딴에는 좋은 뜻으로 가진 앞선 바람들이 욕심이 되어 아이들에게 쉽게 실망하지 않도록 천천히 꾸준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여유가 나에게 있었으면. 이제 보낸 시간 단 하루, 앞으로 189일을 더 봐야할 우리. 지긋지긋한 사이 말고 나긋나긋한 사이가 되어보자.
재, 규, 희, 현, 록, 민, 찬, 연, 서, 우, 주, 경, 태, 선, 상, 준, 웅, 윤, 은, 현, 건, 혜, 기, 수. 올해의 내 시끼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우리가 만났으니 밤하늘에 단 하나 뿐인, 유일한 별자리를 그려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