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파 Nov 12. 2021

닭 앞에서 치킨을 먹다니요

그림책을 읽는 법, 시선은 그림에 머물기


  방과후에 3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국어수업을 하고 있다. 띄어쓰기와 받아쓰기 공부가 주를 이뤘던 1학기 수업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모두 즐겁지 않았다. 2학기 수업 내용에 대한 고민 끝에, 내가 좋아하는 걸 하기로 정했다. 읽기와 쓰기를 하기로.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즐기면 배우는 사람에게 분명 전달된다는 믿음이 있다. 그렇게 2학기의 10번의 수업은 하루에 그림책 한 권을 함께 읽고, 열 줄 글쓰기를 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다행히 아이들의 반응도 좋다. 오늘도 교실 문을 열면서 "오늘은 무슨 그림책 읽어요?" 묻는다. 목소리에 기대 한 스푼이 담겼다.


  오늘 함께 읽은 그림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걀"이었다. 화사깃털 아가씨, 늘씬다리 아가씨, 멋진 볏 아가씨. 세 마리의 닭이 낳은 달걀 중 가장 아름다운 달걀은 누구의 것인지 겨루는 내용이다. 미의 기준은 한 가지가 아니며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단 주제를 담고 있는 그림책이다. (아가씨와 외모 경쟁에서 덜커덩 걸리는 점이 있었으나 오늘은 넘어가 본다.)


  이 방과후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은 맞춤법이나 독해 능력이 또래에 비해 약한 편이다. 그래서 나는 뭐라도 하나 더 가르치겠단 욕심을 부린다. 그림책을 읽는 중간에 맞춤법과 내용 이해 질문을 던지느라 분주해진다.


- 알을 낳다!   '' 받침이 뭘까?

- 방금 나온  이름이 뭐였지?

- 화사깃털 아가씨는 어떤 알을 낳았지?


그렇게 소통인 듯, 불통인 듯. 함께하는 듯, 고독한 수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이 그림책을 가리키며 수군수군 거린다. 지금 책 읽고 있는데 무슨 딴 소리를 하는 거야, 하면서 아이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여기 보세요. 닭들이 앞에 있는데 왕이 치킨을 먹어요. 너무 끔찍하다." 

"아- 이 왕 너무한 거 아니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 진짜 그랬다. 수업 전에 그림책을 미리 읽어봤는데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지점이었다. 이렇게 느낌표가 뜨는 곳이 오늘 누울 자리다.


"그렇네, 닭 앞에서 치킨이라니. 너무하네. 이런 건 어때. 고깃집 앞에 돼지 캐릭터가 웃으면서 "어서 오세요" 하는 건?"


"으악! 그것도 무서운데요?"


그냥 지나치던 풍경을 다르게 본다. 맞춤법보다 의미 있는 배움이다.


"오, 여기 왕 뒤에서 망토를 잡아주는 닭이 있어요. 얘 이름은 왕의 조수닭"


어머, 그렇네. 아이들은 보물찾기 하듯 내 시선이 닿지 않았던 그림책의 이모저모를 발견해낸다.


그림책 연수를 들을 때마다 강사님들이 꼭 하는 말이 있다. "그림책에선 '그림'이 제일 중요해요. 그림을 오래 보세요. " 그림책 수업을 한다고 해놓고선, 그림책에 온전히 빠져들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아이들은 그림책을 뜯어보고, 자세히 보며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오늘도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의 역할이 바뀌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똥 쌀 때 만큼은 가만히 놔둬주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