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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쓰기가 어려워!

다른 말로는 우유부단일까나.

by 현진형

돈을 쓰는 게 쉽지 않다. 돈을 버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런 건지, 내가 번 돈이 아까워서인지 모르지만 돈 쓰는 걸 잘 못 한다. 돈을 잘 써야 돈을 잘 번다는데 아직은 돈을 제대로 벌 준비는 안 되었나 보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날 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동네 부잣집 아들내미로 살아봤다. 거부는 아니었지만 쓸 돈은 충분했고 다니던 학교에 이런저런 기부도 할 만큼 돈이 많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몇 번의 사기로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고 IMF는 내리막길의 마지막을 장식해 줬다. 검은색 로얄싸롱에서 각그랜저로 올라갔던 세단은, 여기저기 긁힌 중고 회색 봉고로 바뀌었다.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급격한 부의 변동은 아마 사춘기 시절의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거다. 돈은 아껴야 하는 것이고,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벌어서 남에게 베풀고도 남을 만큼의 월급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그때가 가장 돈을 잘 썼던 것 같다. 그동안 쌓여있던 마음의 빚을 해소하듯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썼다. 물론 과하진 않았고 그들이 먹고 싶어 하는 건 모두 사 주었다. 나에게 쓰는 돈도 많아졌다. 당시 푹 빠져있던 밴드 장비를 갖추기 위해서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돈을 낭비한다거나 사치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나는 억이 넘는 돈을 모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난 구두쇠가 되어있었다. 아이는 사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내 눈치를 보다가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가 귓속말을 한다. 와이프가 사준다고 하면 반대는 하지 않지만 내가 선뜻 사 주기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 옷이나 신발을 사 준다고 해도 5만 원이 넘는다고 하면 지레 겁부터 먹는다. 뭐가 그렇게 비싸. 하지만 와이프와 아이의 옷과 신발에는 제한이 없다. 이성적으로는 요새 제대로 된 옷이나 신발 사려면 5만 원이란 기준은 턱없이 낮다는 걸 안다. 그래도 감정적으로는 그 턱을 넘을 수가 없다. 어른이 된 이후로 제대로 돈을 써 본 적이 없어서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 구두쇠다.


구두쇠라고 해놓고 이렇게 말하면 웃기지만 집에 일렉기타가 4대다. 밴드를 못 한지도 꽤 되었지만 4대 모두 사연이 있어 정리는 못 하고 있다. 1대는 얼마 전 돌아가신 캐나다 매형이 한국 있을 때 선물로 줬던 빨간 fender, 1대는 b-stock 할인할 때 중고로 구매한 일제 edwards 흰둥이 레스폴(황변이 너무 진행돼서 지금은 아이보리에 가깝다. 게다가 일제는 가격이 너무 올라 팔기도 아깝다), 1대는 나의 드림기타였던 Gibson 레스폴 커스텀 보라색(이것도 중고) 그리고 마지막 1대는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새 기타를 구매한 schecter sd-2 보라색. (그러고 보면 차도 모두 중고를 샀고, 제 돈 주고 새 거 사는 것도 잘 못 한다.) 모두 컨셉도 다르고 모양도 색깔도 사운드도 달라서 무엇하나 정리하기 아까운 건 맞지만, 4대나 되면 일단 관리가 어렵다. 습도에 민감한 목재라 철마다 습도관리 해줘야 하고, 줄도 갈아줘야 하고, 튜닝도 맞춰줘야 하고 등. 기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 컨디션을 갈아 넣어야 할 일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기타 1대를 또 지르고 싶어졌다. 이것도 새 제품은 아니고 단기대여 됐었던 이른바 진열품. 그렇다고 해도 가격은 매력적이고 이 가격이면 괜찮은 중고 구하기도 힘든 수준. (정상적인 합리화의 과정이다.)


결제를 위한 마지막 장애물은 나 자신이다.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도저히 누르지를 못하고 있다. 카드 5% 할인까지 떴는데도 고민 중이다. 과연 이 돈을 나에게 쓰는 게 맞나. 일주일째 고민 중. 누가 빨리 나 대신 사줬으면 하는 생각까지 해 본다. 이 돈을 모아서 더 좋은 걸 살 수 있을까. (딱히 계획성도 없고, 더 좋은 기타에 대한 기준도 없다.) 쓸데없는 자잘한 고민들의 연속. 그래도 사는 게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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