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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항목은 혁신적으로 쓰세요!

어차피 그걸로 평가 안 하니까.

by 현진형

"어차피 그걸로 평가 안 하니까, 평가항목은 혁신적으로 쓰세요"


얼마 전 모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본인 회사의 평가제도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다고 해도, 평가자가 피평가자에게 할 말인가.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공정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해도 최소한의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 저분은 선을 넘었다.




24년도 벌써 5월. 상반기 평가 시즌이다. 연초에 수립한 목표에 대해서 상반기 실적을 가늠하여 중간 평가를 한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연 2회 평가를 하고 물론 연말평가의 비중이 더 높다.) 회사 평가라는 것이 대부분 정량, 정성 평가가 포함되어 있고, 평가자의 주관과 수치의 객관이 섞여 있으므로 100% 공정한 평가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평가자의 입장이 되어 본 사람은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공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회사 평가의 공정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평가는 보통 비밀로 취급되기 때문에 내 자료 이외에 다른 사람의 정보를 열람할 수 없다. 따라서 타인의 수치와 나를 비교하여 검증할 방법이 없다. 그저 떠도는 소문과 나의 뇌피셜에 의존하여 내가 공정한 평가를 받았는가에 대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반대로 평가자 또한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럴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비슷한 수준의 성과를 냈음에 불구하고 상대평가의 원칙 혹은 등급별 비중 등에 따라 고과를 나눠야 하는 현실에 괴로워한다. 그렇게 나온 결과는 과연 공정하게 평가되었는가 하는 꼬리표를 항상 달고 다니게 된다.


학교에서 보는 수학 시험처럼 단일 항목 수치로 평가받는 것이 아닌 바에야 공정함에 걸맞은 기준을 수립하는 건 어렵다. MBO, KPI, OKR 등 많은 성과측정지표들이 있지만 항목의 다양성, 구성, 측정방법 등에 따라서 선명했던 경계는 점점 흐릿해져 간다. 직장인에게 평가란 평가자에게도 피평가자에게도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다.


네이버 야구채널 응원 댓글을 보면 '왜 야구를 그거밖에 못 하냐. 내가 해도 그것보다 잘하겠다'라는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선수입장에서는 정말 화날만한 일이고 아마 '유컴유두(You come You do)'라고 말하고 싶을 거다. 너는 나보다 운동을 훨씬 오래 했으니 당연히 잘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보다 오래 산 사람들은 무조건 나보다 잘 살고 있어야 할 텐데 세상엔 나보다 어린데 잘난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똑같은 출발선에서 뛴다고 해도 결과가 다른 것이 승부의 세계고 결과에 미치는 변수는 내 운동량 말고도 바람, 신발, 옷, 그날의 컨디션 등 무수히 많다. 게다가 현실로 넘어오면 출발선조차 다르다. 그러니 애초에 공정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공정을 논할 수 없으니 공정함을 기대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수많은 변수들이 있지만 우리는 몇 백 년 동안 스포츠 경기를 이어오고 있다. 최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 VAR을 도입하고, 심판수를 늘리고, 복장규정을 고친다. 100% 공정한 평가는 어렵겠지만 최대한 공정한 평가를 위해,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평가를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스포츠의 영역만은 아니다. 회사도 끊임없이 고민하며 평가방식을 바꾸고 있다. 일방형 평가를 벗어나 360도 다면평가를 도입하는가 하면, 앞서 말한 새로운 평가 방식을 도입하고, 각 항목들의 비중을 조정한다. 공정을 향한 걸음들이다.


하지만 지인 회사의 평가자는 그 걸음을 단 한걸음도 내딛지 않았다. 다른 분들이 애써 개척해 놓은 길을 외면하고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 세상이 공정하지 않으니 나도 너를 불공정하게 대하겠다는 마인드는 사회의 수준을 퇴보시킨다. 내 주위에 쓰레기 버리는 사람이 많다고 나도 쓰레기를 버릴 것인가. 내가 쓰레기를 줍는 첫 사람이 되어 옆 사람이 보고 따라 하게 만들 수도 있고, 나 한 명이 쓰레기 줍는 사람의 비중을 51:49로 더 많게 만드는 캐스팅보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저 이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 않으니 그냥 대충 하라고?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는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는 경험의 산물이다. 축적된 경험들이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며 문화를 만든다. 개인 한 명의 경험이 사회 전체의 문화를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아직 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나 스스로 공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미노처럼 쓰러지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버텨줘야 한다. 그리고 그게 조금이라도 더 경험을 한 사람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부정을 내가 본다고 해서 나의 공정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근묵자흑이라고 했지만, 미운오리새끼에서처럼 오리 사이에 섞여 있어도 백조는 백조다. 스스로를 낮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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