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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말고 인생을 건다

by 현진형

인생은 길다. 아니. 길었으면 좋겠다.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다. 하지만 세상은 많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하나만 고르라고 재촉하고 목숨을 걸만큼 절실하게 도전하라고 압박한다. 40년이 넘도록 이것저것 건드려 봤지만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나로서는 그 말이 너무 압박스럽다. 마치 나의 노오력이 부족한 것 같아서.


늘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세상엔 멋진 일들이 너무 많았고 시작만 하면 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신은 나에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은 주셨지만 끝내는 능력은 주지 않으셨다. 비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색깔 있게 살고 싶어 많은 시작을 해 봤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아무것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시작만 하고 끝내지 못하는 나를 자책했다. 일이 바빠서, 아이가 아직 어려서, 몸이 안 좋아서. 핑계가 늘어갈 때마다 자아비판의 수위도 높아져 갔다. 주위엔 시작만 하고 놓아둔 일들이 수두룩 했고 그것들은 오래된 망령처럼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가끔 주위에서 시작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말해주면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비난은 끈질긴 잡초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몇 년을 기다려 구입했던 기타 위엔 먼지가 쌓였고, 다시 볼 거라며 힘들게 가져온 책들은 모니터 받침대가 되어 있었다. 그 대신 핸드폰에 저장된 동영상 개수는 계속 늘어났다. 낮에는 남의 일을 대신해 주며 머슴처럼 일하고, 밤에는 남의 이야기를 쳐다보며 실없이 울고 웃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 멍하니 쳐다보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목숨 걸고 안 합니다. 인생 걸고 하는 거지.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기니까.”


너무 공감이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시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나는 과연 몇 번을 살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목숨 대신 남은 인생을 걸 수 있다면 조금 덜 부담스럽지 않을까. 목숨을 건 사람은 지금 실패하면 끝이지만, 인생을 건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무언가 걸어야만 한다면 인생을 최대한 길게 늘여서 끝날 때까지 도전하면 된다.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모른 척 방치해 두었던 수많은 망령들. 그중에 가장 미련이 남았던 하나. 글쓰기. 언제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기에 더 할 수 없었던 글쓰기. '언제든지'는 '언젠가'로 바뀌어 있었고 너무 깊숙이 처박혀 있어서 알면서도 외면했던 글쓰기. 그 해묵은 도전을 다시 꺼내보기로 했다.


마침 회사 점심시간을 활용한 런치클래스에 '독립출판'이라는 강의가 떴다. 글 쓰는 방법도 알려주고 책도 만들어 준단다. 금쪽같은 점심시간이지만 눈 딱 감고 신청버튼을 눌렀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글쓰기를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내 글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부끄럽고 두려웠지만 시작하기로 했다. 인생을 걸고 하는 나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글쓰기로 정해졌다. 지금 이 순간도 난 새로 산 키보드를 두들기며 글쓰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항상 목숨을 걸고 살기엔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모 아니면 도라는 도박에 모두 걸어야 한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존경받는 시대지만 다른 방법을 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미 포기한 일이라도 다시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은 게 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인데 굳이 지금 주저앉을 필요는 없다. 오랫동안 멈춰져 있던 바퀴를 굴리려면 힘이 들겠지만, 내 앞이 낭떠러지가 아니라 길게 이어진 레일이라고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인생은 길다.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다. 꼭 끝내지 않아도 좋다. 내가 시작하고 멈추지 않은 모든 일에 목숨이 아닌 길고 긴 내 인생을 건다. 인생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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