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를 아직 믿으시나요?

산타가 가져다준 스위치와 함께 한 메리 크리스마스

by 현진형

산타는 없다. 어렸을 적부터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기억할만한 크리스마스의 장면은 없다. 나와 비슷한 40대라면 ‘나 홀로 집에’의 장면들이 오히려 더 선명할지도. 크리스마스는 그저 휴일 혹은 기념일에 불과했다. 나에게 산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 만 8살이 되어가는 아들은 아직 산타를 믿는다. 정확히 말하면 반반이다. 선물은 아빠가 사 주는 것 같은데 소원을 들어주는 건 산타라고 생각한다. 산타에게 원하는 선물을 말하면 그게 각자의 부모한테 전달된다. 즉, 아빠는 산타와의 매개체다. 믿음을 저 버리지 않기 위해서 올해도 산타에게 원하는 선물을 말하라고 했다. 10월부터 선물을 정하지 못하더니 뜬금없이 일주일 전에 닌텐도 스위치를 사 달란다. 집에 닌텐도 위도 있고, 오락실 게임을 할 수 있는 월광보합도 있어서 딱히 끌리지 않았다. 산타는 집에 오락기가 많아지는 걸 싫어할 거라며 필사적으로 설득해 봤지만 어디서 꽂혔는지 일주일 내내 노래를 불렀고 산타는 어린이를 이길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생전 처음으로 작은 트리를 구매했다. 양말을 달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아이를 보며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날이었나 싶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이는 산타가 정말 스위치를 줄까를 고민하고 또 걱정하며 잠들었다. 아이가 잠든 걸 확인하고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나왔다. 닌텐도 스위치, 프로콘, 별의 커비 칩까지. 어두운 거실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트리 아래 3단 선물을 놓으려는 순간 작은 종이 조각을 발견했다. 자러 가기 전 잠시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맞은편에 앉아서 연습장에 뭘 끄적거리고 오리고 버리고 분주하더니 편지를 썼나 보다.


‘산타 할아버지, 닌텐도 스위치 화이트 사주세요! (웃음 가득한 하트)’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났다. 이런 건 아빠 웃음이 아니라 산타 웃음이라고 해야 하나. 준비한 선물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어린이를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산타의 기분은 이런 걸까. 선물을 그냥 놓고 들어가려다 핀란드 산타 역할에 좀 더 몰입해 보기로 했다. 편지에 답장을 써 주는 거다. 산타가 직접 해 주는 답장, 멋지다. 산타는 외국 사람이고 한글을 모를 테니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해서 영어를 쓰자. 산타의 시그니처 컬러인 빨간색으로 써주면 신뢰도가 더 올라가겠지. 과도하게 몰입하여 쓰기 시작한 답장은 앞 장을 꽉 채우고 뒷 장까지 넘어갔다. 쓰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점점 많아졌다. 산타는 허허허 웃기만 해야 하는데 캐릭터의 교집합을 따지다 보니 잔소리꾼 산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쓴 걸 지울 순 없으니 하트에 빨간 색칠을 하고 마무리했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크리스마스. 보통 주말은 9시 넘어서 까지 쿨쿨 자는데 8시 좀 넘어서 벌떡 일어난다. 계속 자는 척을 하고 있으니 엄마에게 가서 속삭인다.


“엄마, 선물 왔는지 안 왔는지 나가 봐도 돼?”


통통 튀며 문을 열고 나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긴장된다. 선물을 발견 못했나. 그럴 수는 없다.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나. 화이트를 사달라고 했는데 네온 블루/레드를 사 줘서 그런가. 온갖 잡생각이 먹구름처럼 머리를 뒤덮고 있는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개봉의 순간이다. 단 한 마디의 말도 내뱉지 않고 조용히, 정말 조용한 상태에서 개봉이 진행된다. 3개의 선물이 모두 열린 걸 귀로 확인했는데 아직도 방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보통은 '으아!'라고 소리 지르며 방으로 들어와 '아빠! 이것 봐. 산타가 스위치를 줬어!'라고 소리쳐야 하지 않나. 또다시 불안해진다. 사고 나서 테스트를 안 해 봤는데 혹시 전원이 안 들어오는 걸까. 뭔가 잘못되거나 부서지거나 고장 난 부분이 있나. 불안으로 모자라 걱정까지 이제 나를 덮친다. 역시 걱정인형은 어디 가지 않는다. 불안과 걱정의 비에 홀딱 젖어 시무룩함이 바닥을 치려고 할 때 드디어 문이 열린다.


“이것 봐! 스위치는 이렇게 생겼어. 너무 예쁘지! 이건 이렇게 끼우는 거야! 그리고 저기 아빠 선물도 있어"

“산타가 아빠 선물도 줬어?”

“응, 아빠랑 같이 하라고 작은 거 뭐 하나 줬던데?”


같이 산 프로콘이 졸지에 내 선물이 되었다. 고맙습니다. 산타 할아버지. 아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타 선물을 다 받아보네요. 입이 한 번 터지기 시작하니 수닥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한참 떠드는 걸 들어주고 나서 왜 처음 나가서 아무 소리도 안 냈는지 물어봤다. 너무 기뻐서 입 밖으로 소리가 안 나왔단다. 몸이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는데 소리 지르면 엄마, 아빠 자는 거 방해될까 봐 소리 없이 개봉했단다. 귀여운 녀석. 그 와중에 배려라니. 어쨌든 비에 홀딱 젖었던 걱정인형은 건조기를 한 바퀴 돌고 보송보송해져서 다시 태어났다. 역시 걱정은 걱정일 뿐. (참고로 우리 집 격언 중 하나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이다.)


밖으로 나가서 설정을 도와주려는데 편지를 가지고 들어온다. 핀란드 산타가 검증받을 시간이다. 두근두근. 산타가 영어로 편지를 써 줬단다. 심지어 내용도 다 이해했다. 아빠 뿌듯. 아니 산타 뿌듯. 하지만 편지는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는 불러오지 못했다. 하긴 실물 스위치가 눈앞에 있는데 편지 따위가 대수인가. 스위치를 들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들을 보며 올해도 산타 역할을 잘 해냈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산타와 아빠의 이중생활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런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나는 점점 할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으니 못 할 것도 없지. 크리스마스만큼은 피터팬이 되어 크리스마스 산타를 계속 믿어다오, 아들아.


느지막이 일어난 와이프가 아들을 껴안고 조용히 물어봤다.


“넌 아직 산타를 믿어?"

“음, 반반이야. 편지는 아빠가 쓴 거 같은데, 선물은 산타가 사준 거 같아. 아빠는 돈이 없거든."


맞다. 나는 돈이 없다. 성격이 구두쇠고 마음이 쫌생이처럼 소인배라 돈 쓰는데 궁색하다. 하지만 산타는 부자다.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1년에 한 번씩 선물을 돌리며 플렉스도 한다. 그래서 선물을 사주려면 나도 1년에 한 번은 산타처럼 부자가 되어야 한다. 통장에 찍혀있는 숫자는 똑같지만 산타의 가면을 쓰는 순간 부들부들 떨리던 손이 멈추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래, 갖고 싶은 거 갖지 못해서 산타를 원망하며 살았던 나보다는, 매년 간절히 원하는 선물을 받고 기뻐하며 산타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낫다.


어릴 때는 산타를 믿지 않았지만 이제 산타를 믿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때 트리 아래 놓인 공짜 선물을 받을 수도 없고 내가 간절히 원하는 일렉기타나 람보르기니를 받을 수는 없지만, 크리스마스만 기다리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아이의 인생을 선물 받았다. 그러니 나에게도 산타가 생긴 셈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볼을 부비며 짤막한 팔과 다리로 날 휘어 감는 귀여운 녀석. 그 녀석이 바로 내 남은 인생의 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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