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을 걸을 때면 언제나
햇살이 가장 찬란하게 쏟아지는 곳만 골라 다닌다.
어쩌면 해바라기 산책이라고 해야 할까.
키 큰 나무들, 그보다 더 거대한 건물들이 드리운 그림자를 피해 따뜻한 빛이 가장 많이 머물고 있는 길을 따라 걷는다.
정수리 위로 내려앉는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때론 조금 돌아서, 아니, 많이 돌아서라도
해가 있는 곳을 찾는다.
아직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아기 강아지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엄마의 젖을 애타게 찾듯
나의 발걸음도 산만하고 마치 길 잃은 사람처럼 방황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너무 멀리 있어 쉽게 닿을 수 없지만
그 빛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이 광활한 우주가 나라는 작은 존재를 잠시나마 알아봐 주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뭉클해진다.
얼마 전, 금융시장이 휴일을 앞두고 일찍 문을 닫았던 날이 있었다. 목요일. 평소보다 훨씬 이른 오후 2시에 장이 닫히는 바람에 뜻밖의 여유가 생겼다. 요즘 부쩍 올리브유며 발사믹 식초, 올리브유에 절인 참치처럼 이탈리아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들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래서 Eataly라는 마트에 늘 가보고 싶었는데, 일찍 퇴근하는 김에 집보다는 회사랑 더 가까운 곳이라 한번 가봤다. 이름 때문인지, 고급스럽고 세련된 마트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마트와 식당이 뒤섞인, 시장 같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데려온 옥수수.
왠지 맨해튼을 닮았다.
윗부분은 칼같이 질서 정연한 격자무늬인데
아랫부분은 무질서하고, 모양도 크기도 제멋대로다.
큰맘 먹고 먹고 싶은걸 다 담았던 쇼핑이었다.
8년 숙성된 발사믹 식초, 유기농 연어 스테이크, 올리브오일에 절인 캔참치, 무항생제 목초 닭가슴살, 올리브, 옥수수, 그리고 껍질 색이 너무나 예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가지까지.
평소라면 알뜰하게 가격표를 하나하나 따져봤을 텐데,
그날은 그런 계산조차 피곤해서
그냥 다 담아버렸다.
이런 걸 충동구매라고 하나보다.
어렸을 때부터 토마토를 아주 싫어했다.
토마토 알레르기가 있다고 거짓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햄버거 안에 들어간 거나 토마토소스 정도는 참고 먹었지만 내가 먼저 찾아 먹는 일은 절대로, 기필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씹었을 때 터지는 시큼한 액체가 너무 싫었다.
그런데 요즘, 나도 이해 안 되는 변화가 생겼다.
건강하고 싶다는 마음이 토마토를 싫어하는 마음의 크기를 넘어선 건지, 매주 장을 볼 때 꼭 토마토를 산다.
파스타에 넣어먹기도 하고, 새우와 마늘과 같이 볶아 감바스를 먹기도 하고, 오이와 함께 섞어 발사믹 식초와 올리브유를 돌린 지중해식 샐러드를 회사 도시락에 싸가기도 한다. 회사에 싸가는 점심은 맛있게 준비해 가야 오전 업무를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데, 내가 그 중요한 한 끼에 토마토를 포함시켰다는 건 정말 혁명적인 일이다.
요즘 체력의 한계를 많이 느껴서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건 뭐든지 간절한 마음으로 해보고 있다. 토마토를 먹게 된 것도 그래서이다. 미각을 포기해서라도 더 건강해질 수 있다면야, 뭐든 못하겠어.
요즘 부쩍 날씨가 좋아져서, 점심을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산책을 나가게 된다. 회사에선 앉아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 조금 걸어줘야 다리도 안 붓고 소화도 잘되는 것 같다.
가끔 일을 하다 밖으로 한 발 내디디면,
전혀 다른 세상에 도착한 기분이 든다.
운동복을 입고 요가 수업을 향해 가는 사람들,
친구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여행객들,
힙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회사 안에서, 회사 사람들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게 내 전부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내 눈에 다르게 살아가는 그들이 조금은 부럽게 보였다.
나는 맨해튼 맨 끝 서쪽에 산다. 그래서인지 매일 같이 그림 같은 석양을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퇴근하기도 전에 해가 져서
집에 도착하면 창밖은 이미 까맣게 식어버린 뒤였는데,
요즘은 퇴근하고 운동하러 나가는 시간에
딱 해가 지기 시작한다.
아쉽게도 카메라는 그 색감을 다 담아내지 못하지만
뉴욕의 하늘은
어느 각도로 찍어도 예쁘다.
진짜 명품 하늘이다.
나는 참, 여유가 필요한 사람인가 보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를 채우고
시간을 아껴 쓴다고 애를 쓰지만
어느 순간, 마음은 구겨진 종이처럼
숨 쉴 틈 없이 구석에 몰려 있더라.
그래서 요즘은
햇빛이 내려앉은 이 벤치에 앉아
그저 멍하니 사람들 걷는 걸 바라보는 게
가장 호사스러운 시간이 되어버렸다.
여유라는 건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더라.
그냥 지금, 내가 멈춰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잠깐이라도 세상을 놓아주는 그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흐르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도 되고
빨리 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간.
내 속도로 숨 쉴 수 있는 순간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여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