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현재완료진행형..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나에게 영어는 모국어만큼 친숙한 거리에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물과 기름처럼 쉽게 섞이지 않고 늘 저 먼 나라 이야기 같은 애증의 존재이다. 평생을 이 정도로 사랑했다가 미워했다가 가까웠다 멀어졌다 밀당을 하고 있으니 그냥 알파벳 말고, 어디엔가 딱 '나는 영어야'하는 존재가 있어야 할 듯싶다.(나한테 왜 그러냐고, 이제 제발 좀 친해지자고 통사정이라도 해보게.)
20살, 대학 1학년이 되었을 때 대학로에서 가장 핫했던 어학원에 파트타임으로 일을 했다. 당시 열풍이던 토익 학원을 등록할 돈이 없어 학원가만 전전긍긍하던 중, 학원관리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아주 운 좋게 꿰찼다. 꽤 많은 학생들이 탐내는 자리였지만, 근무시간과 강도를 듣고서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고맙게도) 알아서 나가떨어졌다.
새벽 6시 30분에 학원 입구 셔터를 열고,
깜깜한 건물에 불을 켜고,
라운지에 텔레비전을 켜고,
강의실들을 환기시키고 정리하고,
냉난방기를 작동시키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가끔 어느 곤고한 자가 쏟아내고 간 것들도 치우고,
카운터에서 수강생들에게 인사하고,
수강등록을 도와주고,
선생님들의 수업 유인물 복사하고,
가끔 배 고픈 선생님들을 위해 간식 심부름도 하고,
또 가끔은 자판기 커피 기계를 열어 내부를 청소하기도 하고.
이런 잡일들을 마치고 나면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 무료로 토익 강의와 영어회화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시간 외 근무를 하는 날은 하루 밥 값 정도 해결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비도 받으니 꿩 먹고 알 먹고였다.
그러나 어디 꿩과 알을 공으로 먹겠는가.
꿀보직 같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잠과 사투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어야 가능한 극한 알바였다. 그래도 나의 유일한 장점인 성실함으로, 3년 동안 약속한 일정에서 단 한 번의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았다.(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
그 성실함 덕분에 영어와 아주 친해졌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방송을 들으며 30분 정도 걸어서 학원에 도착하면 땀이 제법 나면서 운동이 절로 되었다.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라운지에서 당시 흔치 않았던 85인치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자판기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CNN 아나운서의 고급진 영어로 아침을 시작하는 나 자신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누군가 사람은 어느 정도 자뻑이 있어야 지속 가능하다고 했다) 모니터 속의 빨간 원피스를 입은 바비인형 같았던 아나운서의 포즈와 발음을 따라 해 보기도 하며 나는 영어는 잘 못해도 늘 자신감은 충만했었다.
영어학원 아르바이트생 삼 년이면 원어민과 대화 몇 마디 정도는 물 흐르듯 하게 된다.
KFC의 영감님 같은 풍성한 몸매의 원어민 선생님은 일부러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처음 내가 앞 뒤 다 잘라먹고 뼈만 남은 영어를 투척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고 쉬운 문장으로 다시 말해주었다.
2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세상 힙하게 바지를 엉덩이 밑에 내려 입던 원어민 선생님도 처음에는 놀리듯 나에게 몇 마디를 던졌는데 못 알아 들어서 괜히 웃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내가 알아듣고 대꾸하자 이러쿵저러쿵 오며 가며 나에게 자꾸 말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아무렴, 영어 학원 아르바이트생인데, 기초 회화정도는 해야지)
그렇게 나는 영어와 내적으로 외적으로 꽤 친밀해졌고 3년 차쯤 되니 중급회화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훗날 토익, 토플, IELTS 등 수준급의 영어 시험에도 겁 없이 도전할 수 있었다.
초중고를 사교육 없이 다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영어를, 오롯이 내 힘과 노력으로 배우면서 영어를 사랑할 수밖에 없던 황금기였다....
퇴보한 나의 영어
그렇게 재미있던 영어가 어느 순간 시들해졌다.
대학 졸업-대학원-결혼-독일유학생활&육아-귀국-정착
10년의 굵직굵직했던 이 격동의 시기에도 나는 영어와 독일어를 병행해 가며 열심히 공부했었다. 아니 사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꾸역꾸역 했었다는 게 맞는 말이다. 그래서 즐겁지가 않았다. 당시 나는 매일 BBC영어 뉴스를 틀어놓고, 독일어 공부를 하면서, 머리를 쥐어짜며 입으로는 '아, 너무 하기 싫어, 미치겠어'를 왕왕 해댔다. 당연히 영어도, 독일어도 그나마 제대로 할 줄 아는 모국어도 앵앵대는 수준으로, 누가 얘기 한 것처럼 0개 국어를 하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서 영어는 낯설고 어려운, 헤어진 옛 연인 같았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심리적 결별상태가 1년 넘게 지속되다 쌍둥이 임신을 계기로 다시 어렵게 영어에게 다가갔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어학원을 다니며 CNN 뉴스로 태교를 했다면, 쌍둥이 임신 때는 다소 하락한 영어 자신감과 실력에 맞추어 VOA 뉴스로 가볍게 태교를 시작했다. 조기교육 욕심이 아니라 다소 늦은 임신이라, 영어도 열심히, 독서도 열심히, 문화센터에서 하는 꽃 그림 그리는 보타니컬 아트도 열심히, 무엇이든, 아무튼 재미가 없어도 노산의 애미가 쌍둥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용을 썼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출산과 아이의 장기 입원생활, 아이의 장애진단까지, 휘몰아치는 인생의 정점을 찍는 태풍 속에서 휘청일 때, 오히려 이를 악물고 책을 읽고, 영어공부를 했다. 무엇을 해내겠다, 되겠다가 아니라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잠깐의 시간이라도 재미있게 공부를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뉴스 받아 쓰기를 하고, 쉐도잉 학습법으로 공부했다. 그때만큼은 잠깐의 암울한 현실을 잊고 다시 나를 채울 수 있었다. 20대만큼 재미있지도 그렇다고 실력이 눈에 띄게 늘지도 않았지만, 현상 유지라도 한다면 다 쓸데가 있겠지, 생각했다.
그렇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정거리두기 상태의 영어를 계속하다, 몇 년이 훌쩍 흘러, 지금 나는 중학교 1학년, 해커스 문법책을 마주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내 공부가 아니라, 중학생 아들을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사교육 없이 그저 악기, 운동, 취미로 베이킹만 하는 큰 아이를 너무 방목했던 탓인지, 이제라도 내신관리에 들어가 볼까 했더니 학원가에서는 이미 레벨 차이가 나서 동일 학년과 같이 수업이 어렵다는 놀라운(?)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작된 가르치기 위한 영어공부.
- 내가 아는 것을 내 아이 수준에 맞게 설명하기 위한 공부.
- 암기로 버티던 문법이 아니라 버릴 건 버리고(?)-길게 설명해 봐야 한국말 설명이 더 어려운 영문법- 군더더기 없이 직관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한 공부.
재미있는 사실은, 그때는 그렇게 어럽고 이해가 1도 안돼서 통으로 외웠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다시 봤을 때 너무도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주는 힘, 내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만큼 사고의 힘이, 생각의 깊이가 확장되었음을 반증하는, 나이를 먹는다는 게 좋은 유일한 시간의 힘.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쉽게, 명쾌하게 가르쳐주고 싶고, 아이가 영어를 조금이라도 더 다정하게 느낄 수 있도록, 내가 더 영어에 다정하게 다가가게 되고, 친절하게 되고, 더 자주 가까이하게 된다.
가끔 아이를 학교에 태워줄 때마다 핸드폰에 자동으로 연동된 음악앱에서 노래가 흘러 나오는데, 또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유명한 팝송을 아이도 제법 흥얼거린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답지 않게 발음이 구수하고 콩글리쉬에 가깝지만 그렇게라도 영어가 조금은 재미있는 친구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굳이 토 달지 않는다.
이 글은 나의 영어 성장기이자, 현재이다. 어떤 교육론에 대한 설명도 없고 영어 공부 비법에 대한 설명도 없어 김 빠질 수도 있지만, 늘 그렇듯 생각과 결정은 자기 몫이기에, 이 글이 그동안 소원했던 영어에게 다시 손 내밀어 볼까 하는 동기부여 정도만 되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