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놀이의 장이 될 수 있기를.
"전주 할머니 집에 가자"
우리 가족은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전주에 다녀온다. 특히 주말에 가장 막히는 경부선을 이용하다 보니 도로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막히는 도로에서 아이가 탄 자동차 안의 풍경은 어떨까.
비교를 위해 먼저 자가용이 없이 장거리를 여행하던 뚜벅이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유모차를 캐리어 삼아 필요한 모든 것을 싣고 또 등에 짊어진 채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짐도 짐이지만 시한폭탄 같은 아이가 언제 울음을 터뜨릴지 몰라 안절부절못하였다. 아이가 막 돌 지났을 무렵, 달리는 전철에서 내리겠다고 20여 분을 드러누워 울었다. 우리는 결국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고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떼를 쓰던 아이는 내리자마자 잠들었다. 차가운 겨울바람맞으며 20분 넘게 다음 전철을 기다렸던 기억은 모든 것이 처음인 우리 부부에게 또는 비슷한 모든 상황의 부모에게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가 조금 자라면서 막무가내로 떼쓰는 일은 줄었지만, '오늘도 무사히'를 기도하며 유모차와 가방에 떼쓰기 예방 용품들을 주렁주렁 달고 집을 나섰다. 평소에 좋아하던 간식과 장난감들로 가방이 미어터지지만 아이가 울고 떼쓰며 내리자고 하는 것보다는 불편을 감수하는 편이 나았다.
아이가 주변 경치를 보게 될 만큼 자라니 좀 더 수월해졌지만 장거리 여행은 어쨌든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2년 전 자가용을 장만하면서 뚜벅이 생활을 졸업했다. 편리하긴 했으나 자가용 장거리 이동 역시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심야 이동이 아닌 경우 뻥 뚫린 고속도로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늘 막히는 도로에서 막힌다. 그럼에도 그 길을 나서야 하기에 우리는 실시간 교통상황을 확인해가며 안전운전을 위한 긴장의 끈을 조이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피곤한데 꽉 막힌 도로는 모두를 지치게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시트에 묶인 아이의 발악이 심해진다.
일단 고속도로로 나서면 되돌아 갈 수 없고, 정해진 휴게소가 나오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 차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언제 도착하냐고 초 단위로 묻는 5살 아들의 짜증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운전석 뒤쪽에 장착된 태블릿으로 만화를 보여주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대부분 자동차에 이러한 아이템이 장착되어 있으리라.
아이는 2시간 넘는 시간을 열심히 모니터를 보고 있어 준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잠깐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아이는 태블릿을 켜달라고 떼쓰기 시작한다. 태블릿은 전주 할머니 집에 갈 때만 본다고 약속했더니 이제 차만 타면 할머니 집에 가자고 떼쓴다.
장시간 이동에 지루할 아이를 위해 시작한 비디오 시청이(솔직히 말하면 보조석에 앉아 편하게 가고 싶은 내 욕심으로) 할머니 집에 갈 때만 본다는 새로운 규칙이 되고, 어느 순간 아이에게 습관이 돼 버렸다.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마음 조마조마하지 않아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초점 없이 멍하게 시청하는 아이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같은 맥락으로 매일 1시간씩 정해진 시간에만 TV 시청을 규칙적으로 하도록 했더니, 그 약속이 굴레가 됐다. 그 시간만 되면 습관적으로 TV를 보려고 집착했다.)
이 상황에 대해 남편과 진지하게 대화를 한 다음, 아이를 조용히 불렀다.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자동차를 타도 더 이상 만화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격렬히 저항할 줄 알았는데 아이는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함께 태블릿을 뗐다. 대신 예전에 뚜벅이 때처럼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몇 개와 간식을 챙겨 보조석을 포기하고 아이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 몇 번은 만화 보고 싶다고 징징댔지만 같이 색종이 접기도 하고 좋아하는 책은 읽어주니 금세 좋아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빨리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한다. )
이제는 본인이 주도해서 장거리 차 여행을 준비한다. 간단한 보드게임, 포켓몬 카드게임. 퀴즈 맞추기, 끝말잇기, 그리고 덧셈 뺄셈 놀이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다. 어떤 도구 없이도 머리와 입으로 할 수 있는 가성비 '갑' 놀이다. 끝말잇기 1년 사이 아이의 어휘력은 놀랄 만큼 다양해졌다. 특히 뺄셈을 좋아하는 아이의 암셈실력에 놀라게 된다.
가장 최근 여행에서는 1부터 1만까지 숫자를 세면서 1시간을 훌쩍 보냈다. 아이는 본인이 1만까지 셀 수 있다며 어깨를 으쓱했고, 옆에서 같이 세어주느라 입에 쥐가 날 것 같았던 나도 아이를 칭찬해주며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고 이런 놀이가 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는 신나는 음악을 틀고 노래 부르고 어깨를 들썩인다. 일부러 동요를 틀어주지 않는다. 빠른 비트의 팝송도 좋고 K-pop도 좋다. 신나게 몇 곡을 듣다 보면 훌쩍 시간이 흐르고 한 바탕 웃다 보면 기분도 전환된다.
자동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놀이는 상상놀이다. 아이에게 장단 맞춰주느라 너무 지치고 입에서 단내가 날 때쯤, 아이에게 제안한다.
"이제부터는 상상놀이야. 머릿속으로 아주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 거지. "
그리고 우리는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 방법은 꽤 효과가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며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누구나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나는 주로 글로 쓸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 보통 상상놀이는 20분이 채 안돼서 끝나지만 운이 좋으면 아이는 상상놀이 중에 꿈나라로 간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우리 가족의 장거리 자동차 문화가 나은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동차에서 아이가 비디오를 시청하는 것이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고 싶었다.
특별히 같이 장난치며 놀고 이야기할 형제자매가 없는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를 해주고 싶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육아의 고비들은 아직도 백만 가지나 남아있지 않은가. 그때마다 좀 더 나은 방향을 함께 찾고 싶다.
아이와 소통하는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