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있는 정중한 거절하기

'괜찮지 않다'의 후속편 쯤

by Eunjung Kim


어제 Y와 만나 조조할인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가 새삼 마음에 와닿아 정리해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괜찮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와 맞닿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지출처selfpossessedwoman.com/wp-content/uploads/2015/09/Say-No.jpg


'거절의 미학'

Y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다. 괜찮지 않음에 이어 거절에 대해 내가 써내려갈 이야기가 단지 바램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나의 소심한 의지임을 먼저 밝혀둔다.


Y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K라는 사람은 야무지고 똑부러지는 성격이다. 나도 일전에 몇 번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 한적이 있는데 꽤 외향적인가보다 짐작은 했으나 그 이상이었던 듯싶다.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침 없이 말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좋고 싫음이 확실하다는 거다. 설령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반감을 자아낼지언정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지정석 고속버스를 탔는데 뒷좌석 A가 다가와 자기 일행과 나란히 가고 싶으니 자리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고 해보자. 뒷좌석 사람이 최대한 예의를 다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부탁했다는 가정을 했을때 보통은 주저하면서도, 또 썩 내키지 않더라도 바꿔주게 된다. 그런데 K는 주저하지않고 쏘아붙인다.

'왜요? 싫은데요?'

무안해진 A는 자리로 돌아가 일행들에게 퉁퉁댄다. 왜 안바꿔주는지 뭐 저런 사람이 있는지. 반면 일행 중 한 명인 B는 K의 편을 든다. 바꿔줄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럴 수 있다. 오히려 거절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인다고 한다.


사실 이 상황에서 자리를 바꿔달라는 뒷자석 A의 요구가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타당한 이유는 아니기에 K의 행동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런데 여기에 따른 두 가지의 다른 반응도 흥미롭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비아냥거리는 무리와, 어떻게 저렇게 'No'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존경비슷한 감정의 무리가 존재한다. 아예 무관심한 무리는 제외하고.


그런데 전자도 후자도 모두 'No'에 대한 소신 발언이 낯선 이들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아니오'를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No가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또한 막상 거절해야하는 순간, 그 짧은 한 마디 No를 말하기 위해 이런저런 변명 같은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아야 할 만큼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그 파장이 어느정도일지 짐작하기 어려울 때도 많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 많은 인구만큼이나 맞이 하게되는 거절의 상황 또한 가지각색이다. 누군가의 거절이 경제 지표를 바꾸기도 하고, 세계 평화의 안전과 범지구적 운명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큰 그림을 고려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어도, 우리는 순간의 Yes or No가 당장 나의 안위와 세상과의 조화에 미칠 작은 영향을 모두 두려워 한다.

그래서 복잡한 No대신 Yes를 하게 된다. 손해보는게 없다면 인심이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No가 불편하면서도 부럽게 느껴진다.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세대와 나이를 초월하여 소신있게 자기 표현을 하는 것은 건강한 행동인 것 같다. 먼저 자기를 지킬 수 있고, 다음으로 내 생각만큼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를 지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거침 없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K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K는 그런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작은 세상에서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다. K가 속한 공동체를 설득하기에 K의 거절은 정중하지 못하다.

만약 K가 이렇게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아, 죄송해요. 제가 멀미가 좀 심해서 뒷좌석은 많이 불편해서요. 일부러 가운데 통로 자리로 예약했거든요. 미안합니다.'

또는,

'아, 어쩌죠? 제가 다리가 너무 길어서 통로쪽으로 다리를 길게 뻗고 가야하거든요. 바꿔드리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


설령 거짓말이라고해도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시민 작가와 홍준표 전 국회의원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싶다. 두 분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이만한 비교가 또 없을 것 같다.


유시민 작가는 소신 있는 사이다 발언을 한다. 그의 말은 때로는 아픈 가시가 있지만, 주장에 대한 이유가 분명하다. 정중한 태도와 논리적인 타당한 이유로 듣는 사람을 설득시킨다. 그의 말은 사람의 감정을 침략하지도, 강요하지도 않고 대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감정의 동요를 일어나게 한다. 그는 큰 그림을 보면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깨어있는 대인배다.


홍준표 전 국회의원도 소신 발언을 한다. 그런데 그의 태도와 발언은 든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소신만 있지 표현 방법이 서툴고 합당한 이유 없이 감정에 호소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는 K처럼 그런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작은 세상에 만족하며 사는듯 하다.



우리는 괜찮지 않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거절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다만, 방법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에게 거절의 반감을 심어줄 것이냐 타당한 이유로 공감을 끌어낼 것이냐는 방법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한다면 거절도 멋지게, 정중하게하는 노력을 해야하고, 그런 멋진 사람이 곁에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같은 길을 걸어가기길 바란다.

이미지출처http://fbtimepass.com/uploadedimages/Who-Will-Stay-With-You-Depends-Upon-Your-Behavio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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