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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Aug 22. 2019

오이냉국과 삼겹살.

집밥은 사람에 대한 추억이다.

올여름은 그다지 덥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작년 이맘때 날씨를 떠올려보면, 단순한 착각은 아닌 듯도 하고. 어느 순간부터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여름 날씨가 더워지는 건 당연하다 여겼는데, 올해만큼은 세월을 거슬러 간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계절감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매년 여름이 더워지고 있다는 건 절실히 체감하는 중이다. 경험에 비추어볼 때 올해 여름은 지난 몇 년간은 느껴보지 못한,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창문을 열어놓고 뜨거운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드문드문 그날의 기억이 고개를 치켜든다.




나의 고향은 대구다. 하도 덥다고 소문이 나다 보니, 대프리카라는 웃지 못할 호칭도 붙었으나 정작 서울과 대구의 여름이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두 곳 다 살아본 입장에선 서울은 서울대로 덥고, 대구는 대구대로 덥다.


올해 더위에서 대구의 더위가 연상된다면, 올해도 덥다는 이야기가 되려나? 그런 건 아니다. 그 당시에도 대구는 더위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럭저럭 견딜만 하지 않았나하는 느낌이다. 10년도 전의 이야기이므로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데다, 다른 곳에서 살아보지 않았으니 다소 설득력이 부족하긴 하지만서도.



뭐, 그때도 에어컨은 있었으니. 자주 틀어놓진 못하더라도 부모님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더운 날엔 두 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틀 수 있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와, 골목 어딘가서 울려퍼지는 매미 울음소리는 여름이 왔다는 분명한 증거 중 하나였다.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뙤약볕과, 달아오른 열기로 삽시간에 익어버리기 일쑤. 그래도 친구들과 놀기 위해 거침없이 동네를 쏘다니거나, 여차하면 단골인 문방구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기도 했다. 저녁이면 쪼르르 집을 달려와 씻는 둥 마는 둥 물만 끼얹고 식사를 기다렸고.


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고모님이 식사를 준비해주셨다는 점이다. 부모님 두 분다 일 때문에 저녁까지 집을 비우셨고, 사정상 고모님이 오셔서 나와 내 남동생을 돌봐주셨다. 그러다보니 집안살림을 도맡아하신 건 어머니가 아닌 고모님이었고, 고모님이 해주신 밥이 나에겐 곧 집밥이었다.


고모님은 어찌나 카리스마가 있으셨는지,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을 때 고모님이 계시면 그 장난기 넘치던 놈들이 얌전히 지낼 정도였다. 그 분이 지나온 세월이 거칠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어린 나는 알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고모님은 청소면 청소, 빨래면 빨래, 식사 준비면 식사 준비. 모든 살림을 매일 같이 해내셨다. 주말엔 오지 않으셨지만, 평일 내내 반복되는 가사가 그분에게 얼마나 중노동이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단순히 철이 없었다고 퉁치기엔, 너무나 당연히 여기지 않았나 싶다.


집안 곳곳에 고모님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유난히 기억나는 건 역시나 그분의 요리다. 집밥이라 해봐야 특별할 게 없지만, 그래도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곤 했는데 고모님이 해주시던 오이냉국은 더운 여름도 거뜬히 나게 해주는 마법의 반찬이었다.


도저히 밥하곤 어울릴 것 같지 않아도, 얼음을 동동 띄운 냉국과 함께라면 사라진 입맛도 돌아왔다. 특별한 반찬이 없어도 오이냉국으로도 충분한 날도 있었다. 혹가다 다른 반찬은 없냐고 넌지시 여쭤보면, 삼겹살을 구워주시기도 했다.


한껏 열로 달아오른 프라이팬 위에서 노릇노릇한 수준을 넘어, 살 끄트머리에 붙은 비계가 바삭해질 때까지 구워진 삼겹살. 자칫 잘못 씹었다간 이가 나갈 정도였으니. 그래도 기름장에 찍어, 마늘을 올리고 쌈채소와 함께 혹은 삼겹살만으로도 족했다. 그만한 밥반찬은 또 없을 거다.


그 여름날, 삼겹살을 굽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지금에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다. 더위로 가득차 주방에서 범벅이 되어 식사 준비를 마치시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나와 동생을 보며 안방에서 한숨을 돌리시던 고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집밥에 대한 기억은 곧 고모님에 대한 기억이다.




그러던 차 점차 나도, 내 남동생도 중학교-고등학교로 진학하며 고모님이 오시는 일도 없어졌다. 집에 사람이 없으니, 구태여 고모님이 오실 필요도 없어졌고 자연히 발길이 뜸해지셨다. 여전히 함께 식사를 하고는 하지만, 초등학생 때처럼 고모님이 직접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일은 없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갔고, 어느덧 서울생활도 10년을 바라보고 있다. 자취도 햇수로 5년이 넘어갔는데도, 어쩌다 스스로 해먹는 밥에선 집밥의 맛이 나질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이 그 때에만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선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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