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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Oct 14. 2019

불량 신자의 고백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년 10월 13일 일요일, 84번째

돌아온 탕자? 여전히 탕자.

다른 글에서 밝혔던 적도 있지만, 저는 세례식은 물론 견진성사까지 받은, 절차상으로 어엿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하지만 신실한 편은 아니어서, 필요에 따라 신앙을 취사선택(?)했기에 인생에서 힘들었던 시기에만 열심히 다니고 그 순간을 넘기면 발도 들이지 않았었지요.


기실 심신이 힘들었던 순간에도 종교 그 자체가 의지가 되어주었다기보다는 그곳을 통해 알게 된 사람들과 분위기가 힘이 되어주었고 그래서 고난이 지나가면 자연스레 종교와 멀어지게 되었지요. 일신상의 사정은 핑계에 가깝고, 구태여 가야 할 이유가 없으니 자연스레 발걸음이 뜸해졌고 거기에 나태함도 한몫한 셈이죠.


그래도 이와 같은 사실이 내심 부끄러운 지라, 누군가 종교를 물어와도 가톨릭 신자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가톨릭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냉담 신자'입니다. 그러던 차, 갑자기 성당을 다시 나가게 된 건 사라진 신앙심이 돌아와서는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변덕, 내지는 즉흥적인 시도에 가깝겠네요.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고,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하기에 미사만 한 것도 없겠다 싶었거든요. 더욱이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느낌을 익히기에도 좋을 테니까요. 정말로 종교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이유만 가득하군요. 여하튼 그런 이유로 성당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낯설었던, 오래간만의 미사

근 2년 만의 미사는 얼마나 낯설던지. 미사의 순서나 방식은 그대로였지만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죠. 특히나 성가! 제가 기억하고 있던 멜로디와는 너무 달라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달랐었나? 물론 2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성가를 부르는 방식까지 바꿀 정도로 길지는 않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한 2주, 3주 간은 참 이상한 감각이었습니다. 영성체도 하지 않고, 여러모로 빵점짜리 교인이라고 스스로도 그리 여기고 있지만 이거야 원,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눈치도 없이 앉아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저 가만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느낌이었지요.


혹시나 미사가 지역마다 다른 건 아닌가 싶어, 어머니께 여쭤보기도 했습니다. 꾸준히 성당을 다녀오셨으니 무언가 바뀌었다면 가장 잘 알고 계실 터였지요. 어머니로부터 돌아온 답은, '변한 건 없다'는 말이었지요. 아니, 그럼 대체 내가 어렸을 때와 군대에서 해왔던 건 대체 뭐였단 말이죠?!


다시 만난 '그때, 그 미사'

오늘에서야 비로소 예전의 그 느낌 그대로의 미사를 하고 왔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 느지막이 밤 9시 미사를 다녀왔는데, 성가의 멜로디가 어찌나 반갑던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기억이 잘못되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방식이 바뀐 것도 아니었지요. 정확한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시간에 따라 차이가 있었나 봅니다.


갑작스레 어마어마한 안도감이 찾아왔습니다. 여전히 낯선 멜로디가 들려올 때면, 뭔가 잘못 찾아왔나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지만 그래도 이곳, 성당은 변함이 없구나 그런 0이 들었죠. 정말 별 것도 아닌 사실에서 가끔 그렇게 위안을 받을 때가 있잖아요? 오늘이 딱 그랬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꾸준히 성당을 나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9시 미사에 자주 나오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더군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익숙한 성가의 멜로디가 주는 그 감각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터라.


종교적 삶, 혹은 종교와 삶.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늘 미사를 갔더니 예전에 다녔을 때의 멜로디가 들려서 반가웠다'로 압축되지만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성당을 나가게 된 것과 별개로 여전히 저는 신의 존재나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굉장히 회의적입니다.


그럼에도 종교가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의미, 공동체와 삶에 기여하는 부분은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을 테니까요. 제가 종교에 의지했던 때도 있으니 무작정 종교를 비난해본들 누워서 침뱉기밖에 되지 않겠지요.


우리의 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답을 종교에서 찾을 수도 있는 거겠죠. 그에 더해서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그것도 멋진 일입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듯,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삶은 구태여 다른 의미를 더할 필요도 없을 것 같긴 하네요.


여하간 오늘 하루도 끝이 났습니다.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 제각각의 이유로 바쁜 하루를 보내셨으리라 감히 추측해봅니다. 모쪼록 내일은 더 나은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그럼 다음 글에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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