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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Nov 10. 2019

여행기를 쓰려고 보니.

[하루에 짧은 글 한 편] 2019년 11월 10일 일요일, 99번째

막상 쓰려고 보니

지난번 글에서 적어도 주말까지는 여행기를 올린다고 적어놓았습니다.(대체 무책임하게 왜 그랬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녁을 먹고부터 모니터 앞에 앉아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여행지를 선정하게 된 배경은 술술 써나갔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나머지 '여행에 관한 내용'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는지!


꾸역꾸역 1일 차 일정을 한 문단 정도 써나갈 즈음, 우뚝 손가락이 멈췄습니다. 갈피를 잃고 헤매는 느낌이 어찌나 답답하던지. 괜히 자판만 만지작거리기를 몇 번 반복하다,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행기라고 해서 4박 5일의 여정을 줄줄이 늘어놓지는 말자! 쓰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재미가 없었거든요.


보는 사람은 어떨까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독자'를 의식한 여행기라는 걸 써봤던 적이 없었습니다. 자연히 여행기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여행기를 읽어본 적도 없고, 이거야 원. 처음부터 발을 잘못 들인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기록에 대한 강박

정말로 처음인가 싶어서 곰곰이 과거를 돌이켜보기로 했습니다. 어렴풋한 빛이 드문드문 비치는 머릿속을 헤치고 기억의 심연 저 깊숙한 곳으로.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2박 3일 일정으로 다녀왔던 제주도 수학여행을 주제로 써냈던 여행기와, 쓰다 만 영국 여행 일지가 떠올랐습니다.


왜 그렇게 애를 썼는지 모를 정도로 악착같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수학여행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습니다. 기록하느라 정작 여행을 즐길 새가 없었거든요. 지금에 와서는 '열심히 기록했다'는 사실만 기억이 납니다. 영국 여행도 나름대로 열심히 써서 남겼다고 믿었는데 정작 인상이 흐릿합니다.


그때는 '무엇이든 남겨야 한다'라고 믿었습니다. 여행 자체가 드문 경험이었거니와, 여행을 통해서 무언가 변하길 바라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해외여행이라면 강박이 더 심해졌습니다. 평소에는 꿈도 못 꿀 돈을 들여 오랜 시간 해외에 있는데 '그저 잘 놀고 왔다'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여행의 이유

지난 추석, 가족과 부산으로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오릅니다. 그건 여행이었을까요? 추석 연휴 동안 친척집이 아니라 리조트에 가있었을 뿐인 게 아닌가. 대체 무엇을 얻어와야 하나. 언제나 어떤 행동을 통해서 무엇을 얻어야 한다는 욕심이 있다는 걸 발견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영하 작가님이 쓰신 『여행의 이유』를 읽었습니다. 어머니가 사놓으시고 읽으시는 모양이었는데, 저부터 읽어보라고 하시더군요. 이전까지 김영하 작가님의 글은 단편 소설 한두 편 읽어본 게 전부였던 지라 인간 '김영하'를 알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연휴가 끝난 주말 오후, 한 페이지씩 천천히 읽어나가는데 모처럼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김영하 작간미이 여행을 그리 많이 다녔다는 게 놀랍기도 했고, 여행에 대해서 그렇게 다채로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여행에 대해 쓴다면 이렇게 써보고 싶었죠.


정작 나는 '나'일 뿐

하지만. 저는 김영하 작가님이 아닙니다. 여행을 엄청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기껏 여행을 가더라도 무언가 남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편하게 다니자고 결심해보지만 끝끝내 아쉬움만 가득한 채 돌아왔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박물관을 가거나, 명지를 다니거나,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야만 하는 걸까요. 여행을 같이 한 이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론 왜 만족하지 못하는지. 나와 함께 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여행에 의미가 있기를 바라다보니 근처에 있는 소중한 것들마저 놓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여전히 어떤 여행기를 써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을 내리지 못해서 결국 이번 여행기도 미처 다 쓰지 못했습니다.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 욕심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마주하니 착잡하기만 합니다. 글을 쓰는 게 이렇게 어려웠구나, 다시금 깨닫습니다.


끝으로.

어쩌다 보니 마감을 지키지 못한 변명문을 길게 써놓은 것 같아 기분이 미묘합니다. 그렇습니다! 혹시라도 여행기를 기다려주셨다면 너그러이 기다려주시기를. 성에 차지 않는 글을 올리기는 죽어도 싫었습니다. 제 안에 '여행'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직 확실해지지 않았나 봅니다.


어깨에 힘을 좀 빼고 부담 없이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나 다 놀랄 만한 대단한 글이 아니라 저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직은 힘든가봅니다. 모쪼록 오늘 하루도 좋은 일로 가득하셨기를 바라며.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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