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과 자학 사이에서 발버둥치기
인간은 살면서 무수히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어떤 것은 한 번 넘어서면 끝이지만 반복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편견이다.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라는 식의 규정이나 죽었다 깨어나도 무엇을 못한다거나, 할 수 없다거나 등등.
타인에 대한 편견도 좋지 않지만,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편견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쉽게 의식하기 어렵다는 점과 시도해보지도 않은 채로 한계를 그어두고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평생 동안 인식의 감옥에 갇힌 채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지난 28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늘 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불만족스러웠고, 어떤 순간은 포기한 채로 이쯤이면 되었다고 스스로를 속여왔다. 그러나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고,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나를 바꾸어야 한다고 느꼈다. 이 글은 아등바등해왔던 지난날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글씨를 잘 쓰지 못했다. 처음부터 글씨를 못쓴 것은 아니었겠으나, 수업시간에 필기를 하든 혼자 글을 쓰든 급하게 휘갈겨 쓰다 보니 공을 들여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고 싶었다. 글씨를 잘 써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중학교 1학년 때, 충격적인 일을 하나 겪었다. 과학시간에 쪽지시험을 치고, 옆자리에 앉은 짝꿍과 시험지를 교환한 후 채점을 하는데 분명 정답을 적어놓은 문제를 오답처리를 해놓은 것이다. 해당 문제의 정답은 '현무암'이었고 나 역시 '현무암'이라 적었는데, 짝꿍의 눈에는 '현수암'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분한 마음에 항의를 했지만, 짝꿍은 물론 선생님까지 '현수암'으로 보인다며 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찌나 억울했는지. 그때부터 나 스스로 '나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라고 여겼다.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군대에 들어가 글씨 교정을 시작했고, 전역 후 2년 정도 지나서 다시 글씨를 교정하고 있다.
여전히 내 글씨는 '훌륭한 편'은 아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아지지 않았나, 그리 여긴다. 그저 자화자찬은 아닌 것이 취업 박람회에 갔다가 신청서를 작성하던 중에 글씨를 잘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 글씨 교정을 해오고 있던 터라 성과가 궁금하던 차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얼마나 뿌듯하던지.
앞으로도 글씨 교정은 계속할 것이다. 나는 언젠가 글씨를 잘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계속, 글씨를 교정해 나갈 것이다. 매일매일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나 스스로에 대한 편견과 싸우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나는 운동을 잘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축구를 하다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여 골을 빼앗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운동에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스스로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여겼다.
중학교 때, 체육시간의 수행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본 적이 드물고 고등학교 때도 족구를 할 적에 개발이라고 놀린 친구와 대판 싸우고 1년이나 말을 섞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운동을 못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지적당하기는 죽어도 싫었던 게다. 대학에서도 운동을 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운동을 제법 잘하셔서, 어쩌면 나도 노력만 한다면 운동을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력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다 보니 딱히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러다가 크로스핏을 하게 되었고, 2년을 주기로 다니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이번 해에는 제법 오래 다니고 있다.
지금까지 36일 차. 약 두 달 동안 나갈 수 있을 때마다 나간 셈이다. SNS에도 운동을 나갔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겨가며 운동을 나가는 것은, 아주 조금씩 운동 능력이 나아지고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나아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력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주 거짓은 아니다.
인생은 모르겠지만, 운동에 한해서는 그렇다. 설령 아주 조금이라고 해도, 어제보다는 나아진다. 지레 남과 비교해서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나는 매일 같이 운동을 하지 못한다는 편견과 싸우고 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 자신하고만 비교하려 한다.
나는 무언가 꾸준히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인생에서 '꾸준히 해본 기억'을 꼽으라면 수능 준비에 매진했던 고등학교 3학년 때가 유일했으니. 그마저도 그때 당시의 일기에서는 자기혐오와 비난으로 그득히 차 있었다. 매일 조금씩 한다는 일이 가지는 의미를 거의 믿지 않았다.
진정으로 변하려면 하루 아침에 180도로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 덧붙여 완벽주의도 한몫을 했다. 하루 5분씩이라도 운동을 하거나, 글씨를 교정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는 큰 차이를 만든다는 말에 콧방귀를 뀌기 바빴다.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 결과를 뻔히 아는 것마냥 행동했다. 그러다가 올해 초부터, 5분이나 10분이라도 내가 바꾸고자 하는 것들을 해보기로 했다. 웃는 모습이 어색하다니 웃는 표정을 연습했고, 발성과 발음을 연습하고 글씨를 교정했다. 하다 말다 하던 운동도 그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웃는 표정과 발성을 연습하지 않지만, 그때의 경험 덕택에 꾸준히 한다는 행위가 가지는 힘을 믿게 되었다. 여전히 글씨를 교정하고, 운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그 때 얻었지 싶다. 물론 이 편견과는 평생을 싸워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꾸준히 한다'는 것은 끝이 없으니까.
어디 편견이 이것 뿐이겠는가. 세 가지만 꼽았을 뿐이지, 나 자신에 대한 편견은 이보다 더 많다. 아마 내가 의식하지 못한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때때로 그러한 편견 속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날은 생각보다 자주 있다. 지난 주말도, 그런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다 포기하고 싶은' 날이었다.
예전이었더라면 길게는 한 달, 짧더라도 일주일 동안 무기력하게 보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비교적 빨리 그 기분을 털어낼 수 있다. 아마도 꾸준히 해보았기 때문에 그런 지도 모른다. 영원히 계속되는 건 없다고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유야 다양할 것이다.
남은 인생 동안, 나는 끊임없이 편견과 싸울 것이다. 아니, 싸운다기보다도 함께 해나갈 것이다. 28년 동안 쌓아온 것을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바꾸겠는가. 적어도 그 절반에 준하는 시간을 들여야 조금이라도 바뀔 것이다. 그 조금의 변화라도 좋다. 나는 오늘도 그러한 희망에서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