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문디 영화 총서·6/영화 비평 -이론과 실제>를 읽고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자격이 필요하지는 않다. 당사자가 무엇을 좋아한다는데, 그 진정성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만 '좋아한다'는 말이 가지는 무게감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보니 괜히 그 정도를 가늠하게 될 때가 있다.
남들 뿐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망설여진다. 괜한 자격지심 때문에 좋아한다고 드러내놓고 말하기보다는 에둘러서 표현한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때때로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독서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책 사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식이다.
그게 차라리 편하다. 지나친 자기 검열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으나, 가릴 건 확실하게 가리는 게 좋으니까. 섣불리 무언가 '좋다'라고 말하는 건, 진정으로 그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례한 언동으로 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
자기 자신을 거리낌 없이 '애호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 혹은 주변에서 그렇게 불리우는 이들이 이따금씩 부러울 때가 있다. 자타공인, 무언가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사람들. 그들의 말과 행동, 글에서는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애정과 함께 자연스럽게 묻어나온다. 어쩌면 그런 이들이야말로 진정 무언가 비평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의 글은 대상과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가 잦다. 영화든 책이든 비평을 한다기 보다 감상을 늘어놓는 일에 가깝다. 비평을 하기에는 그럴 만한 깜냥도 부족하다. 지식의 양도 문제가 되지만 글 속에서 위화감 없이 녹여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지적 허영이나 과시가 아니라, 이론적 지평을 바탕으로 했을 때 비로소 텍스트의 의미가 구체화되는 순간의 그 명쾌함이란.
그 명쾌함은 분명하게 말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일상적으로 잘 쓰지도 않는 단어를 선택하는 일부터 아주 미묘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가 보인다.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할지 몰라도 이러한 종류의 민감함이야말로 비평 텍스트의 맛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과 문단의 구조, 글 전체와의 유기적인 연결. 글에 관한 모든 사항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깐깐한 자세.
이토록 엄격해야한다면, 나는 비평이란 걸 쓰기도 전에 탈진해서 쓰러질 것이다. 좋은 글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으니. 설사 자기만족이라 해도 이러한 '엄격함'이 전제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큰 차이를 불러오기도 한다. 단숨에 엄격함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노릇이니, 책의 도움을 빌려보는 것도 좋겠다. 그런 의도에서 책 <영화 비평-이론과 실제>를 읽게 되었다.
책 <영화 비평-이론과 실제>는 아모르문디 영화 총서 시리즈의 6번째에 해당한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 비평에 대해 다루고 있다. 1장은 영화 비평이란 무엇인지 일반적 정의을 소개하며 저자의 관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어지는 2장은 영화 비평의 다양한 방법론을 개괄하고 마지막 3장에서는 실제 비평 작성을 위한 실전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훌륭한 미덕은 '어떤 형태의 비평이 옳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기 보다, 각 장의 내용에 따라 여러 비평가의 글을 인용하며 그들 각자의 특징을 다루면서 어째서 좋은 비평인지를 은근하게 알려준다는 데에 있다. 조심스럽지만, 완강한 태도의 바탕에는 '좋은 비평'이 존재한다는 저자의 관점이 분명하게 전제되어 있다.
예술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분명한 격이 있음을 밝히는 단호함에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타인의 노력을 함부로 깎아내려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훌륭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또한 무언가 더 나은 것이 있다는 사실이 다른 무언가가 형편없다는 소리도 아니다. 비평의 역할은 이 '더 나은 무언가'가 왜 '더 나은지'를 밝히는 데에 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이 때 누구나 납득할만한 기준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비평가 개인의 독특한 관점을 드러낼 수 있다. 그 순간 비평은 영화에 대한 주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있는 이야깃거리로 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승화'는 비평이 창작의 영역에 속하는 이유인 동시에 비평가만의 고유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전제가 된다.
비단 영화 비평 뿐만이 아니다. 글이 되었든, 그림이 되었든, 음악이 되었든 창작을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해보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굳이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내'가 있다는 걸로 족할 수도 있지만, '나만'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만족할 수 있다.
비평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작품에 의탁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 탓에, '개성'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듯이 보여도 일단은 비평 그 자체도 '창작'의 영역에 있는지라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나 관점이 없다면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전락하고 만다.
이 세상에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로는 채 설명되지 않는, '고유한 시선'에 대한 문제는 비평에도 존재한다. 전에 없던 것을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이 '개성'을 어떻게 살리느냐를 고민하고 또 글에 담아내는 것이 좋은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인터넷에 감상을 올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마저 흐릿해졌고 그에 따라 비평과 비평가는 그 존재를 시험받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평이 필요하다면 사람들로 하여 영화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기 때문 아닐까? 이 관점이 예리하거나 독특하지 못하다면 문제가 된다. 비평가들 스스로가 노력해야하는 이유다.
저자가 말하듯이 쉽사리 일반의 기준과 타협하지 않는 비평, 높은 수준의 글을 내놓는 각고의 노력 없이는 비평이 스스로의 입지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며, 비평가 각각에게 달려 있는 몫이다. 좋은 글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여전히 비평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