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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Dec 16. 2019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의 에티켓>을 읽고

<죽음의 에티켓> 롤란트 슐츠 지음, 노선정 옮김


초등학교 2학년 때 였습니다. 죽음이 무슨 개념인지도 모르던 시절이었지요. 어느 날 밤, 자려고 어두운 방에 누워 있는데 불현 듯이 공포가 밀려들어왔습니다. 아, 혹시나 죽음이 이런 건가?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으며 세상에 홀로 떨어져있는 느낌. 겁에 질린 채로 일어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부터 죽음을 두고 이해불가능한 무엇으로 이해했었나 봅니다.


나이가 들어서 죽음에 대한 이해가 생겨도, 실체는 여전히 불분명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을 많이 겪어보지는 않았으나, 경험의 유무와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음은 인지를 넘어서는 사건이니까요. 우리는 결코 죽음 그 자체를 겪을 순 없습니다. 대상을 향해 달려가고는 있지만 닿을 리 없는 제논의 역설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죽음이 있기에 삶도 의미를 갖습니다. 담담하게 읊기에는 잔인한 말이지만 이보다 분명한 사실도 없습니다. 여러 창작물에서 '영원한 삶'을 죽음보다 더한 형벌로 다루지도 않습니까. 죽음은 '안식'이기도 합니다. 무엇인가 끝이 나기에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죽음'을 찾아보기는 참 어렵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 또한 꺼려집니다.




죽음이 꺼려지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살아있는 자는 '죽음 너머'를 두려워합니다. 이 삶이 영원하길 바라며 설령 끝나더라도 가능한 오래도록 누리기를 원하지요. 그럼에도 죽음은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이 예정된 결말, '죽음'을 두고 미리 이야기해보는 게 현명한지도 처사가 아닐까요?


오늘 다룰 책 <죽음의 에티켓>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죽고 난 직후와 죽음 이후까지 다룹니다. 죽음의 전체적인 과정이 모두 다루어지는 셈이지요. 저자가 독일인이므로 관련된 절차 또한 독일 당국의 법에 따르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고유한 문화에 따른 몇 가지 차이를 제외한다면 비슷하게 진행될 거라 어렵지 않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각자 죽는 이유는 다르겠지만, 죽고 나서 겪는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책은 '죽음'에 대해 가급적 모든 영역을 다루려고 합니다. 여러 이유로 죽음이 확정된 순간, 신체와 정신은 물론 주변 상황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다루는 1장. 마침내 다가온 죽음과 그 이후에 진행되는 사회적-법적-행정적 절차를 다룬 2장. 모든 의례가 끝나고 남겨진 이들에 대한 3장. 마지막으로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는 새삼스런 사실을 주지하는 4장.


그럼에도 저자는 이 모든 게 결코 '죽음 그 자체'를 정확히 말해주지는 못한다고 책의 말미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주의를 환기합니다. 삶이 그러하듯이, 죽음 또한 특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숫자 만큼 다양한 삶이 있고, 그와 동시에 죽음의 형태 역시 가지각색입니다. 죽음에는 결코 보편적인 형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의 원인은 유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죽음 그 자체는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 자연적으로 죽거나, 각종 병환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자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이유 정도는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나 무엇이 결정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려운 노릇입니다.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죽음에 이르게끔 하는 '단일한' 원인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일 겁니다.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에도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결부됩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조차도 온전한 이해와는 거리가 멀고, 죽음 자체도 결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호흡이 멈추었을 때? 심장이 멈추었을 때? 혹은 뇌가 기능을 정지했을 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도 '죽음'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적인 절차가 남아있으니까요.


여타의 이유로 죽는다는 사실이 확정되었을 때를 한 번 살펴보죠. 그동안 당연했던 모든 게 낯설어집니다. 식사, 호흡, 대화, 주변의 반응. 모든 게 달라집니다. 저자는 그것을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추적해나갑니다.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흔적이 지워지는 모든 과정. 죽음은 놀라울 정도로 건조하게 처리됩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책을 읽는 독자도, 죽음과 관련된 제 3자들, 공무원이나 장례 의식에 관련된 사람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당사자와 친한 사람들조차 죽음은 자신과 무관한 일로 이해한다는 겁니다. 어쩌다 일어난 불행 정도, 나에게는 결코 오지 않을 사건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습니다. 말하는 게 새삼스러울 정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저자의 말대로, 죽음 또한 일상의 일부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에도 죽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서 죽음을 찾아보는 건 어렵습니다. 죽음을 저 멀리 주변으로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공동묘지와 납골당, 화장터는 도시 밖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병자는 물론, 죽어가는 이조차 병원에 격리되어 있다시피 합니다. 이 도시,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죽음은 철저하게 동떨어져 존재합니다. 결코 죽음을 생각할 수 없게 합니다. 소비사회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 역시도 언젠가 죽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과연 한국에서는 어떤 절차로 죽음이 처리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죽기까지, 그리고 죽어서 과연 어떤 절차를 밟는지. 문득 그동안 죽음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게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닙니다. 죽은 이후에 산 자에게 맡겨진 몫, 그것도 죽음의 일부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죽음에 대한 유명한 격언 중,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교만을 방지하고자 소리꾼에게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오늘 다룬 책과 그다지 상관 없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대인에게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봅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축제와 같은 '삶', 그 끝이 결국에는 '죽음'임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모든 게 끝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납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끝은 기어코 오고야 맙니다. 인간에게 그 끝은 바로 죽음입니다. 삶은 영원한 듯이 보이지만,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 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면 결코 붙잡을 수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끝나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허무주의와는 다릅니다. 삶이 가치 있는 이유는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현재 교보문고 eBook for Samsung 북드림 애플리케이션에서 12월 한 달 동안 책 <죽음의 에티켓>을 무료로 대여해주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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