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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Jan 11. 2020

장르라는 주변

<비주류 선언>을 읽고

<비주류 선언> 텍스트릿 엮음


졸업을 앞두고 있던 마지막 학기였다. 졸업 논문이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지만, 기왕이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쓰고 싶었다. 때마침 웹소설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논문의 주제도 문학에서 웹소설을 비평의 대상으로 다루어야 할 이유로 정했다. 기왕 관심 분야로 주제를 정했으니 나름대로 열심히 써보고 싶었다.


관련 논문도 찾아보고, 윤문과 구조 등 이래저래 고심하긴 했으나 의욕은 점차 떨어지고, 학기 막바지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고 말았다. 간신히 졸업 요건에 맞추어 제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열심히 써도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있으나, 여하간 논문의 주된 논조는 다음과 같았다.


문학의 본령이 시대의 반영이고, 비평은 그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금 문학 주변부에서 '웹소설'이라 불리는 일군의 흐름 역시 기꺼이 문학의 일부로 파악해야 하며 마땅히 비평가, 즉 전문가의 주도로 비평이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웹소설이 거대한 자본을 구축한 시장 혹은 산업으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과 지금 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상을 반영하고 있기에, 이른바 문단 주류라 불리는 순문학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처럼 장르문학 나아가서 웹소설에도 유사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감히 고백하건데, 나는 웹소설 독자가 아니다. 아니, 요새는 문학 자체를 거의 읽지 않으니 문학 독자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한때나마 스스로를 장르소설 독자라고 여겨왔고, 국어국문학과라는 전공 탓에 문학 비평을 접하는 과정에서 장르 소설 역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여겼을 따름이다.


비평의 척도가 되는 완성도, 핍진성이니 문학성이니 하는 이야기도 일견 납득할 수는 있지만, 이 시대에 한 흐름으로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장르문학-웹소설을 아예 없는 것 취급하며 방치하는 태도에 대해서 적지 않게 의문이 들었다. 이들이 문학이라는 정의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우리는 장르, 그리고 웹소설을 제대로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것은 지금 여기, 이곳에서 무엇을 욕망하느냐를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성 문단에서 하지 않는다면 독자들 스스로, 혹은 이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이 직접 장르와 웹소설을 다루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주류 선언>과 같은 책이 참 반갑다.


기성 문단과, 비평가 집단이 다루지 않는다고 하여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비주류로서 웹소설이 여기에 있음'을 선언하는 태도에는 더이상 웹소설을 '비주류'로 남아있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럼 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책 <비주류 선언>은 '장르'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한다. 왜 하필, 지금 '장르'를 다루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다루는 시도는 참 정석적이며, '선언'이라는 표현과 더해져 이들의 주장에 무게감을 더한다. 이후 본문은 1장과 2장의 두 가지 파트로 나뉜다.


1장은 장르로 바라본 사회, 2장은 비평으로 바라본 장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수록되어 있는 글의 내용에 따라 분류했다는 의도가 보이지만, 내용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장르, 그리고 웹소설에 대한 비평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저자의 개성에 따라 글의 논조와 구조, 문장 및 표현 등에서 차이가 있는데, 이를 따라가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나 개별 장르를 바라보는 저자들의 번뜩이는 시선이 아주 매력적이다. 분량의 문제 및 직접 읽어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책의 내용을 모두 수록하지는 않겠지만, 1장의 첫 번째 글인 판타지에서는, 한국형 판타지를 다루며 판타지라는 장르의 속성과, 한국이라는 환경에서 판타지가 자생할 수 있었던 이유를 파악하는데 이 때 '한국'이라는 환경과 '판타지'라는 장르 사이의 연관관계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SF를 다루고 있는 1장과 2장의 두 글 모두, 왜 하필 지금 'SF'에 이목이 끌리는지를 분석하면서 과학 기술의 발전을 언급하며 인공지능과 4차 산업 등 익숙한 이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 현상의 핵심을 장르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장르에서 찾아낼 수 있는 시대의 징후들. 예를 들어 로맨스와 페미니즘의 문제, 무협에서의 사이다 심리와 장르 자체의 속성 등 장르 비평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열렬하게 지적한다. 장르문학과 웹소설이 그저 시간을 떼우기 위한 오락거리가 아닌, 전문적인 읽기가 필요한 대상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장르, 웹소설 등을 비평해야하는가, 아니 구태여 비평이 필요한가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비평, 나아가 책 자체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무엇을 욕망하며 무엇을 통하여 그 욕망을 표현하고 해소하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비평이 필요하다.


막강한 자본 유인력을 가진 산업이나 콘텐츠로 바라보는 시각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 기저에서 독자들과 산업 전체를 추동하고 있는 거대한 심리, 곧 이 시대에 잠재해 있는 대중의 욕망과 개별 장르 간의 연관성을 읽어내는 일은 오직 비평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웹소설 비평이 필요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웹소설 또한 문학이기 때문이다. 글의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문학의 외연을 문학하는 이들이 줄이는 일은 너무나도 이상하다. 이것은 왜 문학이 아니란 말인가? 너무나 자본에 천착해있기 때문인가? 그 이유를 밝히는 일도 곧 비평의 역할이 아닐까?


더불어 웹소설의 질이 너무 떨어지는 게 문제라면, 전반적인 상향평준화 역시도 비평이 할 수 있는 역할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문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비평하지 않겠다는 건 책임 회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개 학부생에 불과하고, 더는 관련 학문도 전공하지 않기에 길게 늘여놓은들 부족한 지식의 미천만 보이는 꼴이라 이만 줄이겠다.

※ 비평이 단순한 '자세히 읽기'는 아니겠지만, 비평의 의미를 정의하는 일은 이 짧은 글에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를 다소 편의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이제라도 장르와 웹소설을 제대로 마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텍스트릿과 같은 장르 문학 웹진이 더 늘어나야할 것이며, <비주류 선언>과 같은 책의 출판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이루어져야한다.


독자들 뿐만이 아니라, 문학 내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을 '분명한 흐름'으로 파악해주기를 바라지만, 그것을 외부에서 재촉해본들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장르 문학과 웹소설을 읽고 즐기는 이들이 직접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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