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내가 뭘 읽은 거지?>를 읽고
고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당시 수능을 앞두고 있던 저는 좋은 대학을 들어갈 수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지만, 공부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수능 당일 날의 컨디션은 물론이요, 혹시라도 정답을 몰라서 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에서의 요행(?)이라던가. 수능을 치고 나서, 다른 이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도 중요하지요. 상대평가니까요.
초등학교 이후로 다니지 않던 성당도 다녔으나 그걸로도 모자랐습니다. 확실하지 않았어요. 제가 아니어도 얼마나 많은 수험생이, 심지어 그들의 부모님까지도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알라 누구에게라도 빌고 있지 않겠습니까. 좀 더 확실한 마음의 위안이 필요했어요. 그때 저에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던 책이 있었죠. 바로 <꿈꾸는 다락방>이었습니다. R=VD, 생생히(Vivid) 꿈꾸면(Dream) 이루어지리라(Realization).
이 말이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수능 날 어떻게 될 것인지, 하루를 예상해보며 일기도 썼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수능에서 좋은 결과를 얻길 바라며. 어떻게 됐냐고요? 결과적으로 저는 수능을 망쳤습니다. 수능 점수는 그동안 모의고사에서 나왔던 점수에 한참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라면 다른 수험생들도 상황은 비슷해서, 어떻게 목표로 했던 서울권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요.
그렇게 대학에 들어간 후, 제 안에서는 자기계발서에 대한 의문이 솟구쳤습니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수능을 망쳐서 억울한 심정도 컸지만 도대체가 '자기계발'이라는 말이 못마땅했습니다. 스스로 나아지기 위한 방법이 자기계발이라고 한다면, 자기계발서의 '자기계발'은 무언가 빠져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온갖 책에서 말하는 '자기'도 '계발'도 애매모호하기 그지없었죠.
마침 2011년부터 2013년 즈음까지, 자기계발서를 비롯하여 어쭙잖게 청춘을 위로하려 드는 일군의 흐름을 두고 당사자인 청년 세대는 물론, 여러 곳에서 반감을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반감은 '인문학'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모두 좋은 책이었고, 그들이 제기하는 의문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달라졌나요. 저는 자기계발에 대한 반발을 합리화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자기계발과 사회로 향했던 분노는 곧 방향을 꺾어서 자신의 나태함을 두둔하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그 어떤 제도화된 노력이나 의식적인 움직임도 피하고, 작은 방 안에 틀어박혀 게임과 영화, 만화로 도피했습니다. 자기계발을 탓하기에는, 그때 저는 그냥 지쳐있었나 봅니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을 앞둔 시점에서 저는 제 어깨 위에 놓인 현실의 무게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방탕했던 삶에 방향 축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게을렀던 과거를 반성하고, 자신을 옥죄어야 했죠. 다시 자기계발서에 눈이 갔습니다. 결국 내가 변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다 2016년, 덜컥 무기력이 찾아왔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요. 병원을 갔고 상담을 받았습니다.
지난하기 그지없는 '자기계발'과의 인연은 그 뒤로도 이어졌습니다. 자신을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당장이라도 습관은 물론 인생 전부를 바꿔줄 것 같은 자기계발서를 샀고, 그도 모자라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습니다. 의무와 책임감만으로는 변화가 지속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이 자기-계발은 무엇 하나 목적으로 한 바가 없었기에 공허한 몸부림이었던 것뿐이죠.
그럼에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며 느꼈던 '부족함'이나 '불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계발로는 어쩌지 못하는, 궁극적인 의문.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기계발은 마치 그에 대한 답을 주려는 듯이 굴지만,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지금부터 우리를 현혹해온 자기-계발의 실체를 좀 더 자세히 파헤쳐보겠습니다. 책 <도대체 내가 뭘 읽은 거지>를 통해.
책 <도대체 내가 뭘 읽은 거지>는 시중에 나와있는 자기계발서를 그 특징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하고 각각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책의 내용도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리고 각 장마다 '미처 못다 한 말'이라는 자유로운 형식의 글로 내용을 보강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자기계발서를 각각 계몽적 자기계발서, 초월적 자기계발서, 성공담 자기계발서, 관리형 자기계발서, 위로형 자기계발서, 이기적 자기계발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제 그 각각이 가진 특징과 작가의 문제의식을 간략하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먼저 계몽적 자기 계발서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더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독자를 다그치며, 끊임없이 개인이 변화할 것을 종용하는 계몽적 자기계발서는 성공이 개인의 변화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마시멜로 이야기>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등이 있습니다.
그다음, 초월적 자기계발서입니다. 무엇인가 간절히 바란다면 우주가 들어준다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심취했던 <꿈꾸는 다락방>은 물론이요, 베스트셀러던 <시크릿>을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들 초월적 자기계발서는 세상의 숨겨진 비밀이라도 꿰뚫는 듯이 굴지만, 궤변에 불과할 뿐이며 계몽적 자기계발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문제를 교묘하게 가립니다.
세 번째로 성공담 자기계발서입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개인이 뛰어난 노력 끝에 성공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을 이룹니다. 그들의 성공은 감동적이며, 희망을 선사하는 듯이 보이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성공이 노력 여하에 따라 개별적인 가치에 매겨진다는 것이죠. 실패한 개인은 '노력하지 않은' 것이 되고,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배후에 숨긴다는 문제는 여전합니다.
관리형 자기 계발서는, 실용서적으로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계발이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종류인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시간과 대인관계, 습관 등 모든 것을 통하여 더 나은 결과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기술 그 자체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목적이 개인의 성공에만 매몰되어 있는 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각자도생의 현실을 아무것도 바꾸어 놓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제부터 다룰 자기계발서들은 '당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논조에서 '바뀌지 않아도 괜찮다'로 방향을 크게 전환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구조에 대한 불만을 개인에게 돌린다는 점이 변하지 않으니까요. 위로형 자기계발서는 인간관계와 사회에 지친 사람들에게 따스한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어디까지나 소비사회의 산물일 뿐,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이기적 자기계발서도 위로형 자기계발서와 궤를 같이 합니다. 사람들은 가짜 위로도 필요 없고, 상처 받지 않는 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자존감이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만, 이러한 부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을 더 낫게 만드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6가지로 분류된 자기계발서는 각각의 문제가 있습니다만, 이들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문제의 원인을 사회가 아닌 개인에게 돌린다는 겁니다. 성공을 하지 못했다면,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 '나'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어디 그게 사실인가요?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성공 자체도 의뭉스럽습니다. 부유하면 성공일까요? 저자 역시 성공의 정의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과연 이들이 말하는 성공, 자기계발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냐는 거죠. 나아가 우리의 욕망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성공하지 말자는 건 아니죠. 성공을 위한 노력도 분명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성공이라는 게 우리들 스스로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니라면 다릅니다. 또한 성공의 결을 누가 어떻게 판단하나요. 그렇게 성공을 하나하나 나누어 대단함과 부족함을 나눈다면 우리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겁니다.
자기와 계발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와 '연대'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나 혼자 살겠다며 남들은 모르는 비밀이나 비결 따위의 방법을 강구할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함께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독자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가 모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시대의 풍조와, 2030 청춘을 향한 부당한 시선에 청년 세대는 분노했었습니다. 보수 정권의 집권을 두고 청년 세대의 저조한 투표를 문제 삼았던 이들과 '노력'과 '열정'을 강요했던 이들.
위로형 자기계발서와 이기적 자기계발서가 나온 배경입니다. 그렇기에 '연대'라느니 '우리'라느니 하는 말이 허울 좋을 뿐인 표어로 느껴질 뿐이었겠죠. 물론 촛불집회는 물론, 정치 효능감은 물론 '우리'를 실감할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아마 이 부분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는 듯합니다.
이와 이어져 책의 구성에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결론의 부재입니다. '미처 못다 한 말'이라는 추가적인 파트는 물론, 곳곳에서 자기계발서를 넘어서기 위한 태도를 제시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책 말미에서 대안을 충분한 분량을 할애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었더라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우리, 연대. 다 좋지만, 우리가 대체 어떻게 '우리'와 '연대'를 이루어나갈 수 있을까요? 아마 한정된 분량 안에서 대안까지 제시하기는 어려웠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저자에게만 그 중책을 떠넘길 게 아니라 독자들 스스로가 자기 계발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보아야겠지요.
저자는 독자 개개인이 그런 역할을 맡아주기를 기대했기에 일부러 결론에 해당하는 파트를 빼놓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독자 된 입장에서 그 방법을 고민해보는 게 마땅하겠죠. 과연 우리가 자기계발서를 넘어서 이 현실을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글쎄요. 정작 제 자신도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와 '연대'가 필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대체 어떻게 '나'를 '우리'로 엮을 것이며, '연대'해야할까요? 파편화된 나를 우리로 묶을 고리가 먼저 필요할 듯합니다.
그 방법은 어쩌면 주변을 향한 애정 어린 관심에 있지 않나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나에게 편중되어 있는 시선을 조금만 돌려도 바깥에는 나와 아주 똑같지 않아도 비슷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만의 문제라 여겼던 것이 타인에게도 있다면 우리는 이제 그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문제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꼭 집회나 모임 같이 단체 행동이 아니더라도 목소리를 모으고 이것을 표출할 수 있다면 사회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어디까지나 막연한 상상에 불과합니다만,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봐도 좋을 듯 합니다. '우리'와 '연대'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책을 덮으면 우리를 기다리는 건 여전히 그대로인 현실입니다. 책이 주장한 대로 우리와 연대가 필요한 건 알겠지만, 방법도 막막하고 팍팍한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요. 자세한 방법은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네요. 이 '의문'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