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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Mar 03. 2020

여전히 불안한 현대사회

<불안한 현대사회>를 읽고


파편화된 우리

현대 사회의 불안을 진단하는 책들이 여럿 있다. 각자의 주장에 따라 불안의 이유도 천차만별이다. 과도한 경쟁이나, 너무나 빠른 기술 발전, 인구 폭발과 자원 소모 문제 등 하나하나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책은 현대 사회를 이룬 사상적 근간인 개인주의가 불안의 근원임을 지적하고 있다.


개인주의는 근대를 열어젖힌 맹아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서 가치에 대한 논의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그 자신의 이념적 근간마저 파괴하고 있다. 개인주의의 한 극단에 이르면, 모든 개인의 선택은 동등하며 가치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우리는 이 똑같이 훌륭한 것들 사이에서 무엇이 더 훌륭한지, 나쁜지 알 수 없게 된다.


더욱이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일이 최우선 과제로 놓이는 이상, 주변의 모든 것, 사물부터 행위와 관계, 나아가 인간 그 자체도 수단에 불과해진다. 이토록 거대한 불안을 초래한 개인주의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두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찰스 테일러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자.


책 <불안한 현대 사회> 소개

책은 2001년에 출간되었고, 2019년 12월 30일에 개정판이 재출간되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장은 20년 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세 가지 문제, 개인주의와, 도구적 합리성, 그리고 정치적 자유의 상실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20년 전과는 달라진 것도 있다. 개인주의가 뻗어나가는 동시에 타자에 배타적인 현상을 위시로 집단에 대한 결속을 지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반동은, 개인주의가 불러온 가치의 붕괴와도 이어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가치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으니, 기준을 세우는 이들도 나올 수 밖에.


찰스 테일러의 문제제기에서 더욱 나아가서 우리 시대의 문제를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개인주의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머물러서는 우리가 딛고 서있는 지평이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시대의 현상과 어떻게 섞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책의 내용부터 보아야 한다.


개인주의, 그 복잡한 문제

우선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부터 해결해야 한다. 개인주의에 대한 논쟁은 그것을 찬성하는 쪽이든 반대하는 쪽이든 개념을 오용하거나 엉뚱한 지점에서 상대방을 비판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개인주의라는 개념이 이기주의와 개인이 온전히 자신의 삶에서 가치를 찾는 형태, 두 가지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 두 개념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기에 개인주의에 대한 논쟁은 소모적으로 흐르기 쉽다. 저자 또한 이를 지적하며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것을 비판하거나 옹호하기보다 그것이 불러온 가치의 공백, 그리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에 주안점을 두자고 강조한다.


이러한 개인주의의 폐해는 다른 두 가지 문제, 도구적 합리성의 문제와 정치적 자유 혹은 효능감의 상실과 이어진다. 이들 모두가 긴밀하게 엮여있어서, 개별적인 사안으로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에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을 면밀히 파악하는 일에 어려움만 증폭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개인주의 자체는 별반 문제 될 게 없어 보인다. 근대 시민 사회의 형성에 개인주의가 미친 영향을 감안하면, 어떤 공고한 가치 체계를 보다도 '개인'을 우선시하며 개인이 자기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현상은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결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된 것은 시대가 흐르며 개인주의의 양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국가나 종교와 같은 외부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가치를 찾으며 그에 충실하게 산다.'는 개념은 어느새 모든 가치가 동등하다는 몰가치적인 주장으로 치환되었으며 나아가서는 나를 위해 주변을 수단화해도 좋다는 명제로 성립했다.


국가는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이 섣불리 파악할 수 없는 규모로 커졌다. 개인은 자신의 집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으며, 공동체를 위한 행위에서 가치를 찾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정치적 자유의 상실로 이어진다.


실제로 자유가 없어진 건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방향의 상실과 그로 인한 행동의 부재가 자유가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과정에서 온화한 독재의 출현, 즉 시민 사회의 자율성이 거세될 가능성도 커진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다름 아닌 '개인주의'가 놓여있다.


자기에 대한 회복

대안은 없어보인다. 이미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른다. 감히 개인주의를 지적하는 일조차 근대 이전의 비이성적인 사회로 회귀하자는 주장으로 여겨진다. 물론 모든 개인의 선택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만 하며, 이를 동등하게 대우받아야한다는 말은 훌륭하기 그지 없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가치있는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저자는 이러한 개인주의가 지닌 모순, 내부적 붕괴를 집요하게 지적한다. 선택 그 자체는 결코 가치에 대한 보증이 될 수 없다. 그것이 하필 '내'가 선택했다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무엇에 견주어 '가치'를 가늠한다. 개인주의는 그 가치의 시금석이 되지 못한다.


결국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자기'에 대한 개념부터 재고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야한다고 굳게 믿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자기'는 대체 어디에서 연유했는가? '자기'는 역사나 문화를 초월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조명해보아야 한다. 아무런 배경 없이 자기가 생기지 않듯이, 우리는 사회와 주변의 인간들로부터 가치를 확립해나간다. 이 가치에 충실하게 사는 일로서의 진정한 '자기 개념'을 되찾아가자고 저자는 주장한다.


끝으로

물론 2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가 찰스 테일러의 주장대로 '자기 개념'을 회복했는지, 개인주의의 병폐를 잘 이겨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여전히 자기 속에 갇혀서 자기 삶에만 충실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는 이러한 무관심을 등에 업고 세력을 불려나간다.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비대해진 개인주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또 다른 논의를 함께 살펴봐야하겠다. 바로 미치코 가쿠타니의 책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인데, 해당 책의 서평을 작성하며 이번 서평에서 제기된 개인주의에 대한 문제를 이어나가보려고 한다.


용어는 물론, 저자의 주장이 워낙 함축적인 문장과 글로 제시되어 있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혹시 이 서평이 책에 대한 오해로 이루어져있다면 그것은 전부 글쓴이의 잘못이다. 서평은 물론이고 책에 대한 어떤 의견이라도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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