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헤아리는 마음의 이름>를 읽고
때는 2018년 2학기,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18학점도 모자라 19학점을 꽉꽉 채워야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2학점짜리 필수 교양을 2개 신청했으니, 하나를 더 들어야 겨우 맞아떨어지더군요. 대개 2학점짜리 강의는 교양강의 중에서 비교적 부담이 덜해서 대체 뭘 들어야 좋을지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야 무슨 강의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대학교 4년의 마지막 학기에 기왕 강의를 들을 거라면 관심 있는 분야가 좋지 않나 싶어 한참 동안 뚫어져라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때마침 인권에 관한 강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학점이 등급으로 나뉘어있지 않고 Pass나 Fail로 나오는 수업이라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는 데다가 인권에 대한 내용이라니. 이만한 게 없었지요. 직접 강의를 듣고 보니 공정을 비롯하여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치고 말았을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볼 수 있어 뜻깊었던 시간이었죠.
그때도 의구심이 들었지만, 과연 '인권'이라는 게 강의라는 형태로 배울 수 있는 개념인지 의문이 듭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인권은 참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호흡과 마찬가지죠.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대등하게 누릴 수 있고, 누려야만 하는 권리. 그것이 인권이니까요.
물고기가 물이 없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인권이 없는 상황을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을 겪어본 적도 딱히 없는 게 사실이구요. 그럼에도 이는 굉장한 착각일 수 있습니다. 불과 100년 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진실로 대등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 모든 게 OECD에 가입된, 이른바 선진국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중에서도 중산층 가정에게만 국한된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인권은 강의에서 배울 수 있다기보다는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점검하며 고쳐나가야 하는 현재 진행형의 상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소개할 책 <평등, 헤아리는 마음의 이름>은 앞서 개략적으로 다루었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해당 도서는 청소년 논픽션 시리즈로 기획되었기에 청소년이 아닌 이들이 읽기에는 뭔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생이나 성인이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기획 과정에서의 의도는 십분 이해할 수 있으나, 인권에 관해 배우는데 청소년과 성인을 나누는 것 자체가 어색해 보입니다. 아마도 구어체의 문장으로 너무 어렵지 않게 쓰였다는 것이 성인용 도서와 청소년 도서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마저도 굉장히 애매모호한 기준이지만 말이지요.
책은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장은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지며 평등, 공정 그리고 능력주의에 대해 다룹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 단어들이 가진 의미가 서로 뒤섞이고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이 개념들은 대체 어쩌다가 오-남용되는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일까요?
한 번쯤 위 이미지를 보신 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평등과 공정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고는 하니까요. 아래에 Liberation은 저도 처음 보는데, 해당 이미지가 소개된 글에서 논의의 확장을 위해 추가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책에서도 이를 소개하며 '평등'과 공정'의 개념에 접근합니다.
정말로 '무조건적 평등'이나 '공평'은 나쁜 것이고, '공정' 혹은 '정의'는 그에 대비되는, 보다 긍정적인 개념인 것일까요? 저자는 그런 것이야말로 오해라며, 고대 그리스로부터 인류의 보편 인권 개념이 태동한 근대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까지 전제해야만 공정도 함께 논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물론 위의 이미지가 말하고 싶은 바는, 무조건적인 평등보다도 각자의 능력과 상황에 따라 사회적 재화를 다르게 분배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메시지일 겁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공리주의에 입각한 논리의 연장이라면 다르게 생각해보아야 할 겁니다. 단순히 공정과 평등을 이야기하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죠.
또 다른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이 있는 이가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능력주의 자체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보입니다. 만약 그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아주 훌륭한 개념이겠죠. 그러나 이 '능력'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능력주의라는 말 자체가 비교적 근자에 만들어졌습니다. 사용된 이유조차도 능력주의가 초래할 미래상을 비판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이것을 하나의 '덕목'으로서 체화한 배경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성공을 능력과 더불어 공정함에 결부 짓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3884.html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각자가 가진 능력으로만 판단한다. 참으로 익숙한 문구입니다. 그러나 이때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정말로 공정한지, 애초에 능력이라는 게 무엇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능력은 그 자체로 아주 공정한 개념일까요? 각자 얼마나 노력했는지 여하에 달려있으니 그럴 것도 같습니다.
이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은 그 자체로 공정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선천적인 재능의 유무와 각자의 환경에 따라 노력에 투입되는 시간과 재화가 다르고 당연히 산출량도 다를 테니까요. 또한 능력을 시험의 통과 여부나 점수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짧은 글에서 다루기에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책에서도 선뜻 정답을 내어놓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런 과정을 거쳐왔고, 우리 시대에는 우리 시대만의 답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이런 문제를 고민해보는 것과 고민해보지 않는 것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평등이나 공정,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문제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적절하게 조정되어야 합니다.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동시대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의견을 나눌 필요도 있고요.
이 책은 그저 '청소년 도서'라는 분류 하에 청소년들에게만 읽힐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살기 바쁘다며 혹은 이야기해봤자 해결되지 않을 게 뻔하다며 잠시 미뤄두었던 문제들을, 오늘 한 번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