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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Mar 11. 2020

철학이 쓸모없는 시대의 쓸모

<철학의 태도>를 읽고

아즈마 히로키와의 만남

나는 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했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 당시나 한국문학은 물론 문단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문학적 성취와 그에 대한 담론, 비평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반대급부로 일본 서브컬처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 한국의 라이트노벨이나 웹툰, 웹소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고민하곤 했었다.


그러던 차, 2학년 즈음에 대학교 선배로부터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집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7)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2012)을 소개받아 읽게 되었다. 그때의 충격이란!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배제되기 일쑤이던 하위문화, 그중에서도 '오타쿠 문화'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흥미 본위의 독서였기 때문에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을 멋대로 오독했을 여지가 다분하다. 그럼에도 아즈마 히로키라는 비평가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각별한 일이었다. 서브컬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와 비평의 방법론에 있어서 하나의 예시가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벌써 10년 전의 이야기다.


다시 그를 만나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브컬처에 대한 관심도 예전 같지는 않으며, 자연스레 그에 대한 소비도 줄어들었다. 어쩌다 한 번씩 찾아본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을 들여온 버릇이 있어서 몸에 익어버린 탓이었다. 그 빈도마저 서서히 줄어들어 혹 가다 있을까 말까 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던 차, 온오프믹스에서 진행하는 서평 이벤트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철학의 태도>를 보게 되었다. 신간이 나왔나 싶어 반가운 마음에 신청을 하려던 차, 일전에 퇴짜를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안 될 거라 지레 포기하려다가 안 되더라도 신청은 해볼 수 있지 않나 싶어 얼렁뚱땅 양식을 채워나갔다.


며칠이 지나서, 이벤트 대상자로 선정되었을 때는 어찌나 얼떨떨하던지. <철학의 태도>를 읽으며, 일련의 사건이 그가 주장한 오배가 아닌가 갖다붙여보기도 했다. 우연한 만남에 뒤이어서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게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여하간 그렇게 아즈마 히로키의 신간을 읽어보게 되었다.


철학자로서의 아즈마 히로키

상술하였듯, 아즈마 히로키는 위의 두 비평집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서브컬처 비평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의 저작 <존재론적, 우편적>을 비롯하여 철학에 대한 진지한 접근에 관심 있는 분들도 있겠으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하더라도 그를 서브컬처 비평가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아즈마 히로키의 초기 저작만을 읽고서 생긴, 일종의 오해였다. 애시당초 아즈마 히로키에게 있어서 서브컬처 비평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철학으로 이어지는 통로인 셈이다. 현대 사회에 두드러지는 징후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우리 삶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더욱이 아즈마 히로키는 더 이상 서브컬처 비평을 하고 있지 않다. 대학에서 벗어나 출판사를 차려 잡지를 내고 동시에 겐론카페라는 이름의 철학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놀랄만한 일이다. 선뜻 납득하기 쉽지 않을 만큼 파격적인 행보다. 그 배경과 이유를 오늘 소개할 책 <철학의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 <철학의 태도> 소개

책 <철학의 태도>는 아즈마 히로키와 역자인 안천의 대담집이다. 본격적인 철학서 혹은 학술서라기보다는, 아즈마 히로키라는 사람,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철학의 의미와 역할을 소개하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이전 저작을 전혀 모르더라도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용어가 가지는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철학의 역사와 주요 사상가의 이름과 그의 주장을 모를 경우에는 지장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마저도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아즈마 히로키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주제는 '이 시대에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나아가서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가깝다.


그 자신이 보여주듯이, 철학은 말로만 그치는 게 아닌 삶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육화되어야 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강단을 벗어나 출판사를 차리고, 카페를 연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철학이든 비평이든 이 시대에 더 이상 먹히지 않는 것은 이러한 '공간'이 부재하고, 삶에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라 말한다.


인문학의 죽음 이후

한국에서도 인문학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지금은 다소 잠잠해진 것 같다. 대학의 죽음이라느니, 인문학의 쇠퇴라느니. 이 시대야말로 인문학이 필요하며 대학은 물론 삶의 현장에서 이를 살려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은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그라들었다. 그 대신 교양이라는 말이 슬쩍 자리 잡았다.


아마도 인문학이라는 말보다는 교양이 좀 더 그럴싸하다는 인상을 주기 쉽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본다. 또한 단어만 놓고 보아도 교양 쪽이 훨씬 이해하기도 쉽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일단은 모종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에 잠재된 욕망은 인문학 때와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바로 삶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길 바라는 욕망이다. 겉핥기로나마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 시대는 과거와 같은 거대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을 정초하는 알기 쉬운 지침이었던 국가나 종교 따위가 유명무실해졌고, 개인은 덩그러니 이 세계에 놓이게 되었다. 


삶을 살아간다는 문제

삶의 방향키는 온전히 개인의 손에 맡겨졌으나, 그것을 감당할 만큼 개인의 여력이 성장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대로 즉물적으로 살아가는 '동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것이 '오타쿠'였다. 이것이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지만,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시대에 대한 분석으로는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문제는 그 유효함은 어디까지나 분석에 머무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된 삶은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침묵하고 만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 봉착한 한계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큰 위기다.


아즈마 히로키는 여기서 철학의 본래 역할을 다시 묻는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든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진정으로 삶 속에서 그 의미를 전유하기란 어려워지고 말았다. 그에 대한 답으로서 관광과 오배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관광과 오배(誤配)

관광과 오배는 실제로 현실에 뛰어들어 대상과 만나고 사건을 접하는 과정을 뜻한다.  굳이 여행-여기서는 관광-을 갈 필요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여행을 간다. 언뜻 보기에는 시간 낭비에다가 쓸모없어 보이는 행위지만, 관광은 각자가 지닌 고유한 맥락 속에서 독특한 의미를 만들어 내게 된다.


또한 관광은 기왕의 정보를 확인하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현실은 변수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항상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게 되어있다. 여기에는 어떤 책임감도 필요하지도 않다. 또한 목적한 바도 아니므로 우연을 있는 그대로 향유할 수 있다.


그야말로 관광객의 태도로 살아가는 것. 설사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직접 그곳에 가보고 그때그대 다르게 성립하는 맥락 속에서 벌어지는 우연에 몸을 맡겨보는 것. 그로부터 생겨나는 의미들이야말로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관광과 오배를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쓸모없음의 쓸모

흔히들 철학을 두고 쓸모없는 짓거리를 한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쓸모없음'은 철학과 떼어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쓸모없는 일을 통하여 비로소 의미를 찾아내기도 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주장한 관광과 오배도 이 쓸모없음에 대한 적극적인 시도의 연장이다.


이는 실천과도 이어진다. 아즈마 히로키는 철학이 대학교와 강단에만 머무르기에 죽어간다고 보았다. 겉은 그럴싸할지 몰라도, 철학을 하는 이들의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철학을 추동할 수 없다.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만 비로소 철학은 그 무게를 획득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삶의 양상 속에서 철학이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철학을 비롯해 비평에도 도움이 된다. 텍스트는 결코 그 자체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맥락 속에서 존재하기 떄문이고, 지금 시대에는 더더욱 그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으니 말이다.


태도로서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는 <철학의 태도>를 통하여 이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논한다. 그가 대단한 점은 논의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탁상 공론에 머무른다면 태도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목이 뜻하는 바도 분명하다. 이 시대, 그리고 인간에게 철학이 어떤 역할이어야 하는지, 철학의 본위로서의 태도라는 의미. 그리고 철학하는 이의 태도는 어떠해야하는지, 철학자의 태도로서의 의미. 그리고 삶 속에서 철학하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예시로써 철학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아즈마 히로키라는 철학자는 누구인지는 물론 그 사상의 정수가 빠짐 없이 담겨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우리 시대에 철학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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