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깨면 내가 부처>를 읽고
어렸을 때는 절이 싫었다. 주말이면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서 산사를 가곤 했으므로 당시의 나로서는 황금 같은 주말을 모조리 반납해야 하는 가족 여행 자체도 달갑지 않았거니와 하고 많은 곳 중에 하필이면 절을 가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머님 당신은 성당을 다니시는 데도 굳이 시간을 내어 절에 가시다니!
어느새부턴가 절을 간다고 하면 반사적으로 짜증부터 냈다. 그놈의 절, 그놈의 불교! 절 가는 걸 싫어한다고 불교까지 싫으라는 법은 없지만, 절하면 불교. 불교는 절이라는 연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마련이니 괜한 반감도 생겼다. 종교 자체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마당에, 불교라고 예외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한 평생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수도승의 삶에는 묘한 경외감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20대 후반에 접어들며 불교에 대한 인상은 서서히 바뀌었다. 그간 불교에 대한 이해라고 해봐야 오해와 편견으로 얼룩진 선입견이었음을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명상을 시작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과거에는 명상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행위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무언가, 신비주의에 한 발짝 걸친 수행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작년에 마음 챙김 명상을 알게 되면서 그러한 착각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불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명상이 추구하는 바는 불교적 가르침과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 대한 일체의 관념도 놓아두고서 피어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좇아가지 않으며 내면 깊숙한 곳의 의식을 또렷하게 관조하는 행위. 명상이 추구하는 것도 불교의 무념무상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가만히 앉아있으며 잡념을 떨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더욱이 잡념이라는 게 떨쳐낸다고 떨쳐지는 종류의 것도 아니고, 현대인에게 있어 가만히 앉아있는 것 자체로도 시간낭비 내지는 사치로 여겨지지 않는가.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명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명상을 시작했다며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으나 주변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명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는 때가 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을 하기보다 솔직한 편이 낫지 않은가. 돌아오는 대답 중에서도 특히나 어머니와 대학교 선배의 반응이 인상적이었다.
어머니는 기왕 명상을 할 거면 성당에도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참에 성당도 다시 다니면서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자연스레 권유해오셨다. 당신도 피정을 하러 전국 각지의 성당에서 명상을 하고 있으시다면서 이참에 나 역시도 은근히 성당으로 복귀하시길 바라는 눈치였다. 알아서 하겠노라고 둘러댔지만 말이다.
대학교 선배도 정토회나 불교 대학에 가보는 게 어떠냐며 제안을 해왔다. 또한 한 번 읽어보라며 건네준 책이 바로 서암 스님의 범어집인 <꿈을 깨면 내가 부처>였다. 당장 어느 종교에 다닐 생각은 없으나 책이라면 읽어볼 수 있으니 흔쾌히 받아들었다. 하루에 조금씩 읽어나가는데 무언가 뚫리는 느낌이 있었다.
책은 깨우침이라는 제목의 서문으로 시작하여 총 4장으로 구성되어있다. 범어집이라는 분류대로 서암 스님과 신자 간의 문답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불교 교리에 대한 소상한 설명은 물론이고 생활 속에서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고민과, 수행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각 장의 분류 또한 주제 별로 나뉘어있다. 그러나 책의 어느 페이지부터 읽어도 무리 없다. 책을 순서대로 읽으라는 법은 없지만 괜한 의무감에 첫페이지부터 참고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형식과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불교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서암 스님에 대한 소개는 책의 마지막에서야 확인할 수 있는데, 도대체 왜 이런 대단한 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의아함을 자아낼 정도다.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 법륜 스님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라도 한 두 번은 이름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신기한 노릇이다.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수행한 바를 풀어놓은 책을, 감히 한 마디로 줄일 수 없겠으나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단 한 마디를 꼽으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깨달음에는 위 아래가 없고, 정해진 틀이 없다는 말은 <꿈을 깨면 내가 부처>라는 제목과도 상통한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397
중생은 미몽에 시달리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꿈은 꿈일 뿐, 아무리 좋은 꿈이라도 꿈에서 깨지 않으면 영원히 꿈 속에서 머무르는 것 뿐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꿈에서 깨치는 것 뿐이다. 해탈 혹은 부처는 곧 꿈에서 깬 상태와 같다. 그리고 부처는 나의 밖에 있는 게 아니라, 꿈을 깬 자야말로 부처라고 할 수 있다.
한 평생을 바쳐 수행에 매진해온 이에게서 터져나오는 발언은 그 자체로 무게를 지닌다. 부득이 서평에서는 그 흉내를 낼 수밖에 없으나,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서암 스님의 말에 탄복하게 된다. 교리나 수행, 세세한 것들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수한 길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이 책이 선사하는 가장 큰 울림은 삶에서 견지해야할 태도를 담담이 말하는 데에 있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답이며, 행복하기 위한 길이어야 한다는 말은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 뿐만 안디ㅏ.
행복이든 부처든 자기밖에 있지 않다.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구해야 하며, 기쁨도 슬픔도 모두 나에게서 비롯한다. 또한 수행이나 생활에 있어서도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므로 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무엇을 옳다며 정해놓으면 결국 그에 갇혀버린다. 또 다른 미혹에 빠져 살고 있지는 않는지, 매순간 또렷히 깨어있으며 살기 위한 방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