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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Jul 01. 2020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영화

영화 <#살아있다(2020)> 감상

지난 2020년 6월 29일, 오래간만에 영화관에 다녀왔습니다.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기승을 떨치기 시작한 시점부터 출근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 말고는 웬만하면 밀폐된 공공시설은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오늘 소개할 영화를 보기 위해 부득이 집을 나섰습니다.


3개월 만의 영화 감상, 자리를 한 칸씩 띄우고 상영 시간 동안 마스크를 써야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여하간 이번 글에서는 영화 <#살아있다>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영화 <#살아있다(2020)>


좀비-영화로서의 <#살아있다>

영화 <#살아있다>의 트레일러만 봤을 때는 영화 <부산행>처럼 좀비가 등장하는 장르 영화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영화에서도 '좀비'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는데다가 딱히 좀비 영화가 선사하는 쾌감도 크지 않았습니다. 좀비 영화라는 명칭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였지요.


좀비영화라고 해도, 워낙에 종류가 다양하다보니 함부로 비교하기 어렵지만, 저로서는 최근에 감상한 영화 <좀비랜드>와 후속작인 <좀비랜드:더블탭>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설사 같은 좀비라고 해도 '한국'이라는 특수성과 만나게 되면 이렇게 그릴 수밖에 없구나하고 말이죠.


그냥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좀비영화 <좀비랜드>와 <좀비랜드:더블탭>


<좀비랜드>는 세계가 적당히 망한 이후, 살아남은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총기 소지가 합법인 미국이 배경이다보니, 아무래도 좀비 때문에 애를 먹는 상황은 코미디하게 다루어집니다. 물론 좀비는 떼거지로 몰려다니니 위기감은 있지만, 그래도 총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죠.


반면에 <#살아있다>에서는 가스총조차 소지하기 힘든 한국이 배경이라, 좀비의 출현이 더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느낄 무력감과 긴장감의 무게가 달라지죠. 동시에 좀비 영화 특유의 장르적 쾌감도 덜합니다. 좀비 머리를 깨부수는 장면도 통쾌하다기보단, 처절하게 보이니까요.


재난 영화로서의 <#살아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좀비 영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재난 영화에 더 가깝습니다. 평화롭던 현재에 갑자기 좀비라는 재난이 들이닥친 셈이죠. 이들이 왜 나타났는지도 밝혀지지 않고, 영화 속 인물들도 딱히 그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건 한복판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인물의 모습 속에서 관객이 발견하는 것은 재난 영화와의 유사성입니다. 더욱이 이 영화에서 탈출을 위한 도구로 등산 장비가 활용되는데, 그 장면에서 영화 <엑시트>를 떠올린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우스꽝스런 포스터가 흠이라면 흠인 영화 <엑시트>


주연 인물들이 모두 20대와 30대라는 점, 절체절명의 순간 의지할 대상이 서로밖에 없다는 것, 등산 도구의 활용까지, 사건의 중심 소재가 좀비와 유독가스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두 영화는 정말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습니다.


영화 <#살아있다>의 제목부터 <엑시트>의 인물들이 '우리 여기 살아있다'고 내지르는 외침과 참 닮아있죠. 하필 이 두 영화가 그렇게 닮은 이유는, 지금 이 시대에 20대와 30대를 대변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우리는 재난과 같은 현실의 한복판에 살고 있으며, 양상만 다를 뿐이라는 거죠.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대한 영화 <#살아있다>

이 영화는 좀비 영화나, 재난 영화 어느 하나에만 집중해서는 전체를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그 외연은 좀비 영화의 모습을 띄고 있을지 몰라도, 좀비라는 단어를 명시적으로 쓰고 있지 않으며 감염 사태라는 미묘한 표현으로 우회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보여주는 오프닝 영상은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연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좀비'는 그 자체로 중요하기보다, 좀비와 비슷한 무언가를 등장시켜 말하고 싶은 바가 있었다고 보는 게 나을 듯합니다.


글쎄요, 영화가 개봉한 시기와 맞물려 코로나를 비롯한 감염증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말했듯 우리는 이미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화 속의 좀비 사태는 코로나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혹을 영화 속 묘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화 시작에 미세먼지에 대한 보도는 물론 마지막에 이르러 좀비 사태를 두고 '감염 사태'로 명명하며,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있는 아파트 단지와 도시 위주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5만 명 정도의 구체적인 피해자를 낳았다는 아나운서의 말 등.



또한 변화한 시대의 양상을 영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극 중에서 준우(유아인 분)가 창문을 가리기 위해 활용환 알록달록한 쓰레기봉투는 마치 인스타그램이나 여타 SNS 어플리케이션의 아이콘을 떠올리게 합니다. 정작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이 자신을 피력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이 자신을 꽁꽁 감싸야 하는 모습은 스크린 속에서 굉장히 위화감 넘치게 표현됩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며 기어코 자살을 결심한 준우가 살아남게 된 계기가 열어놓은 창문밖으로 유빈(박신혜 분)이 레이저를 쏘았기 때문이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세상 밖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보이는 연출이지요.


두 사람 모두 자살을 결심했으나, 어찌되었건 살아남고자 마음을 바꾸었고 그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좀비 사태라는 초유의 위기에서도 다른 인간의 존재는 위로가 됩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코로나로 자가격리를 해야하는 분들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물론 이들은 자발적이지도 않고 생존을 위해 틀어박히는 것을 선택했지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스크린 밖의 우리와 퍽 닮아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살아남은 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 딱히 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듯 영화는 많은 지점에서 현실과 교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삶을 이어나갈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몇 가지 더 재미있는 점들이 있습니다. 좀비가 창궐하며 일상적인 행동들조차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보이게 됩니다. 가령 난간에 기대어 위험천만하게 셀카를 찍는 행위는, 짜릿한 도피행각이 아닌 전파를 잡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되고 SNS에 업로드하는 게시물은 자기 과시가 아닌 생존 신고로 둔갑합니다.


하물며 편리한 기능을 제공하던 무선 이어폰은 라디오 하나 듣지 못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드론은 영화 속에서 상당히 유용하게 활용되는데, 무선 이어폰과 이어서 생각해보면 '선'이 필요 없는 도구들이 선을 잇기 위해 활용된다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유용한 기능을 자랑하는 각종 디지털 기기가 거의 쓸모 없어지거나, 혹은 이전의 시대에 활용되던 도구의 열화판으로 전락하는 상황 속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들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건 구닥다리나 다름 없는 물건들이죠.



특히나 <엑시트>에서도 쏠쏠하게 활용되었던 등산 관련 소재는 <#살아있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며 왜 하필 등산일까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과잉 해석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등산이란 우리가 지난 세대로부터 물려받을만한 의미있는 자산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엑시트>도 그러했듯이 영화 속에서는 믿을만한 부모나 윗세대가 없습니다. 아랫 세대에게도 양보하느라 바쁘고 살아남기 위해서 아둥바둥해야하는데 이는 더이상 예전의 방식으로는 생존조차 담보할 수 없어진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기성 세대와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어쨌거나 그들로부터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 하나는 확실히 물려받았으니까요. 그리고 등산과 같이 고루하지만 확실히 써먹을 수 있는 생존의 지혜도 일부나마 물려받았습니다.


그 몇 안 되는 단서들로 시대의 광풍을 이겨낼 방법을 만들어내야하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최후에 군대에 구조되는 모습은 다소간 힘 빠지는 결말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외에는 영화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놓기 어려웠을 거라는 점에서 일견 이해도 갑니다.


영화 인물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더이상 사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없을 겁니다. 그리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이 '살아있다'는 말로 다시 쓰이는 지점에서 우리는 삶이란 그저 '개인' 혼자서 이룩하는 게 아닌 타인의 삶에서부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화의 종반에 등장한 또 다른 생존자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인물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가 다소 모호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것에 대한 윤리적 딜레마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전염병 사태에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이 뿐만 아니라 경찰이 등장해 좀비들에게 잡아먹히는 장면도, 타인의 위기를 그저 지켜만 봐야 하는 인물의 무력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누군가의 죽움을 내버려둔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했던 건지 알 수 없더군요. 영화가 한 편으로서 잘 정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한 편의 장편 영화라기보다는 외려 여러 편의 드라마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차라리 TV 시리즈로 적합하지 않았을는지. 영화가 끝까지 좀 더 힘있게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시도는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좀비 영화와 더불어 주제의식까지 담아내고자 했던 제작자의 의도에 박수를 보냅니다.



끝으로

영화 <#살아있다>는 좀비 영화지만 참으로 집요하게 좀비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 바탕에 깔린 의도는 영화가 시대에 대한 은유로 읽히기를 바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제목에 활용된 해시태그부터 영화의 내용과 연출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구요.


부족하나마 다양한 지점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했으나, 미처 다루지 못한 지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미진한 부분에 대해 댓글로 남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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