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날의 돌림노래>를 읽고
사사키 아타루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은 2012년 즈음입니다. 그때 당시 국내에 소개되었던 사사키 아타루의 신작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와서는 대체 무슨 내용 때문에 그리도 충격을 받았는지 가물가물하여, 충격이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감이 있으나 나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철학자'를 마주했다는 놀라움이었을 거라 짐작해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사키 아타루의 책은 그동안의 독서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책을 읽는다고 믿어왔지만 그것은 '읽는 시늉'에 가까웠지 철저한 '읽기 그 자체'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반성을 해보게 되었죠. 더욱이 인쇄물의 종말 운운하던 시대에, 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차마 반론하기 어려운, 묘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에서 끊임없이 독서를 이어나가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인간,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책에 있다니. 그야, 책으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그토록 열심히 책을 읽어온 사람에게 '책'이 가진 힘은 대단하겠습니다만, 다른 이들에게도 이 같은 주장을 하려면 얼마나 확신이 있어야 했을까요. 사사키 아타루 그 자신부터 '책'과 '문학'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겠죠.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가 또 한 번 '문학'과 '책'의 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전연 새로울 게 없습니다. 그의 이름을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아, 어렴풋한 인상만 가지고 있었음에도 망설임 없이 뽑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책을 읽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뭔가 제대로 읽어야 할 것 같고, 잠깐 살펴봤더니 힙합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대체 무슨 책인가 싶었거든요.
하루 이틀, 일주일, 심지어는 한 달, 아니 거의 세 달 남짓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한이 되면 도서관에 반납을 하러 갔다가 다시 빌리기를 몇 번 반복했는지. 왜 그렇게 미련을 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런 책 하나 못 읽겠나 분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고, 예전에 이런 철학자도 알았다는 괜한 허영심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는 사명감 같은 이유였을 수도 있지요.
마침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왜 이제야 읽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들이었거든요. 어쩌면 준비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준비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금'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든지. 여하간 서론이 너무나 길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책 <이 나날의 돌림노래>는 저자인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출판한 이후에 다양한 사람들과 진행한 대담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한국에서 2018년에 출판되었을 뿐, 일본에서는 벌써 10년도 전인 2011년에 출판되었지요. 따지고 보면 꽤 헤묵은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 사사키 아타루의 관점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그때로부터 더욱 나아갔을 수도 있으니까요.
에둘러 표현하기는 했지만 달라졌을 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나아갔으면 나아갔지, 굽힐 양반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거든요. 고작해야 2권 뿐이지만, 사사키 아타루의 저작을 읽으며 그에 대한 묘한 신뢰 같은 것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함부로 굽히진 않겠구나. 계속해서 읽고 또 읽어온 사람이라면, 그만큼 문학과 책, 나아가 언어의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고 있겠구나
사사키 아타루의 대담집인 <이 나날의 돌림노래>에서는 그런 태도를 더욱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사사키 아타루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는 이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여서 그런지, 사사키 아타루의 말도 학문적으로 정제되었다기보다는 날것의 언어에 가까웠습니다. 꾸미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그의 모습에서 강한 호소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담집 전체를 관통하는 사사키 아타루의 주장은 '문학은 굉장히 젊은 예술이며, 언어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굉장한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키 아타루를 아시는 분들에게는 전혀 낯설 것이 없는 주장이지만, 문학이 이미 죽었다드니, 몰락하고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중에 사사키 아타루의 이 같은 주장은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언뜻 보아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지요.
사사키 아타루는 즉답합니다. 음악과 회화, 춤은 인류가 태동하던 시절부터 있었다고. 그에 비하면 언어는, 문학은 5천년 전부터 시작한 아주 젊은 예술이라고. 그 안에는 음악과, 회화, 춤이 보여주는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있다고.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기에는, 언어를 활용하고 있는 우리 인간이 아직 그 가능성을 미처 다 끌어내지 못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주장을 보았을 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저 자신도 더이상 문학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며, 책을 읽는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아직 우리는 제대로 문학을, 언어를 다루어보지 못한 게 아닐까요. 그럼에도, 영상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스펙타클이 판치고 있는 시대에 언어의 힘은 참으로 보잘 것 없어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문학이, 언어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제아무리 영상 매체가 대세가 되었다고 한들, 인류가 언어를 이용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언어를 반드시 써야하므로 사라질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언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생동감, 그 자체로 춤 이며 음악으로서의 역동성을 강조합니다. 언어는 아직 그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으며, 얼마든지 더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문학과 출판이 쇠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게으른 편집자들과 독자를 얕본 출판계의 문제라고 일갈합니다. 요즘 독자들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며, 수월한 책을 양산하지만 결국 자기들 스스로 출판의 저질화에 일조한 셈입니다. 책이 어려운가를 따지는 일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그렇다한들, 이유는 그리 단순하지 않을 테니까요.
사사키 아타루의 주장을 요약하자니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서평이라면 저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 전달해야하겠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글은 참고로만 하시고,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은 직접 읽어보는 것이 이해하기에도 수월하고, 훨씬 재미있거든요. 지금부터는 책의 내용 중에서 다른 이야기를 더 해볼까합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사사키 아타루의 주장도 몹시 흥미롭지만, 이 대담집에서 유난히 재미있는 부분은 그의 기묘한 이력입니다. 특히나 사사키 아타루가 힙합이라는 장르에도 조예가 깊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입니다. 힙합과 철학이라니. 그러나 그가 언어에 관심이 많다는 걸 떠올려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닙니다. 힙합 또한 언어를 정교하게 다루어야 하는 작업이니까요.
물론 사사키 아타루가 힙합을 좋아하는 건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철학과 힙합에 대한 의견이 만나는 부분은 꽤나 의미심장합니다. 철학자로서 스스로를 힙합의 '외부인'으로 간주하며, 힙합과 언어의 가능성 두 가지를 동시에 타진하는 자세에서는 과연 사사키 아타루는 천상 철학자구나 싶기도 하고, 대상이 무엇이든 사사키 아타루의 관심은 철저히 언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일본 힙합의 세대에 대해 이야기하며, 지난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가 갈라져 나오는 지점, 즉 기성과는 달라져 어떤 '신선함'이 잉태되는 순간을 말할 때에는 더 이상 힙합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시와 언어라는 거대한 흐름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를 버리고 나아가는 것이 아닌, 계승하며 잇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책의 제목인 <이 나날의 돌림노래> 또한, 그저 무한히 반복되는 '도돌이표'라는 의미에서의 돌림 노래가 아닌, 언뜻 보기에는 지난한 반복으로 여겨질 지라도 그 속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새로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흐름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역사는 진보해왔다는 헤묵은 말로는 차마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니까요.
책의 한 대목에서는, 재즈의 자유분방함을 두고 철저한 반복과 연습을 통해서만 가능한 '자유'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도 한 가지 더 배울 수 있습니다. 새로움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닌 과거 - 그동안 쌓여온 모든 것이 나의 안에서 체화될 때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태도라는 겁니다. 오직 연습, 또 연습만이 그러한 '즉흥 연주'로 나아갈 수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마찬가지로 끈질긴 단련, 계속되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참말로 자유로 나아갈 수 있고 더욱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이 주장을 일관되게 해오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의 언어를 둘러싼 외피를 다 걷어내고 보면 남는 건 바로 이 같은 단순한 진리입니다. 어쩌면 이것조차 제 오독일 수도 있겠군요. 그러면 또 읽고 읽는 수밖에 없죠. 잘 이해할 때까지.
사실 좀 더 일찍, 책을 읽자마자 이 글을 써야하는 건 아니었나하는 후회도 듭니다. 아니면 책을 반납하기 전에 한 번 더 읽을 걸 그럤나, 싶기도 하구요. 그러나 이 핑계 저 핑계 들어가며 글을 쓰는 걸 미룰 바에야 부족한 글이나마 서둘러 써보자고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써서 오늘에야 완성했습니다. 글을 묵혀서 써버릇 하질 않다보니 어색하기도 하고, 에전에 썼던 분량을 볼 때마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황망한 기분이 듭니다.
그래도 이 책을 한 분이라도 더 읽어보셨으면 하여 어떻게든 마무리지어 올립니다. 사사키 아타루의 책에 관심이 있으셨던 분들이거나, 혹은 문학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내용이 궁금하신 분,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뭔가 뜨거운 글을 읽고 싶은 분들께서는 한 번 쯤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사사키 아타루의 글에는 그런 뜨거움이 있으니까요. 물론 재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