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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Sep 01. 2020

내가 책을 읽는 이유 (1)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고

책 읽기와 글 쓰기의 이유

취업을 하고 어느덧 6개월이 흘렀습니다. 내 손으로 돈을 번다니, 어엿한 성인이 된 느낌에 괜히 뿌듯할 때도 있지만 마냥 자유롭던 백수 시절이 종종 그립습니다. 막연히 일이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쓰기 어렵다는 게 가장 큽니다. 특히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시간을 내기 어려워졌지요.


예전에는 집에서 뒹굴거리다 원할 때면 내키는 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출근할 때나 잠들기 전 10분 정도, 아니면 주말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시간이라도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악착 같이 책을 읽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지만 문득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 싶어 괜히 허망해집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해왔으니까, 그것이 어느새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도 같고 딱히 그 이유를 대자니 별 건 없습니다.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일종의 허영이거나 강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나를 가장 나답게 한다는 생각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좋은 글을 읽었을 때입니다.


문장의 힘

아니, 어쩌면 좋은 문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하간 읽고 있자면 참으로 감탄사를 절로 내뱉게 되는 그런 종류의 책들이 있습니다. 그 표현이 너무나도 절묘하여 나는 왜 이런 걸 생각하지 못했나 반성하거나 혹은 내가 생각해왔던 것들을 이런 방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는 책들.


책 전체의 내용이 전부 좋을 수도 있고, 혹은 어떤 구절이나, 단 한 문장이라고 할 지라도. 그런 좋은 문장 혹은 글과의 만남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계속해서 책을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줍니다. 그 순간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라고 탁 트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마치 탄산음료를 들이켰을 때의 청량감마저 있습니다. 명쾌하다고 해야 할까요.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구나, 어떤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이런 시야가 있을 수 있구나.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알려줍니다. 좋은 책이란 그렇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도 그런 책입니다.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소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한겨레출판 ( 이미지 출처 -  YES24)

첫 번째 책은 문학평론가 신형철 님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입니다. 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이미 다 알고 계실 법한 유명한 분이겠지만, 저는 이 분의 존재를 대학교 졸업이 가까워진 즈음에나 알았습니다. 이렇게 소개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접해볼 법도 했는데, 그럴만한 나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저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 한국문학과 주류 문단에 괜한 적개심으로 거리를 뒀었습니다. 웃긴 것은 정작 그 '문단'이 무엇을 하는 곳이고 어떤 것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는 것이죠. 졸업할 때가 가까워졌을 즈음에야 그런 괜한 선입견이 걷혀가고 있었습니다. 뭐, 졸업하는데 아무렴 어떻습니까.


여하간 신형철 님의 비평집인 <몰락의 에티카>도 읽어보자고 대여해놓고는 반납과 대여만 숱하게 반복하고 언젠가 읽겠노라 결심만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게 되었고 읽을 만한 게 없어서 이래저래 뒤적거리다 이 책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지요. 이제야 읽어볼 수 있겠구나 싶었거든요.


좋은 문장, 좋은 글

좋은 책은 한 마디로 말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럴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다양한 주제를 다룬 글을 몇 가지로 분류해놓은 산문집이기 때문에, 전부를 아울러 이렇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목에 나와있듯이 이것들은 쉽사리 무뎌지지 않으려 하는 어떤 노력들을 보여줍니다.


무엇에 무뎌지느냐는 글마다 다릅니다.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일 수도 있고, 내가 당면한 현실, 혹은 글쓰기일 때도 있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공부하며 배워가는 것. 그 태도가 책 곳곳에 묻어나옵니다. 특히나 문장에 대해서 신형철 님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을지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그런 고민을 해봤나 괜히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토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글들이 좋았지만 개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글쓰기에 관한 글로 4부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에 '봄날의 새끼 곰과 정말이지 굉장한 것'이라는 글이었습니다.


굉장히, 굉장한.

(전략) 또 나는 최근에 어떤 좌담을 읽다가 참석자들이 '굉장히'리는 부사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정말 굉장할 때는 어쩌려는 것일까. '굉장히 굉장한'이라고 해야 할까.(후략)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4장 '봄날의 새끼 곰과 정말이지 굉장한 것'에서 발췌


부득이 책의 일부만을 발췌하였습니다. 꼭 전문을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책 전체를 읽으시면 더욱 좋겠고요. 여하간, 이 책의 여러 글들도 좋았지만 특히나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이 장을 유심히 읽게 되었습니다.


위의 글에서는 요즈음 어떤 상황을 말할 때면 '헐'이나 '대박'따위의 간소화된 언어에 의존하는 것 같다며,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의 예를 듭니다. 정말로 '굉장한 것'을 말하려면 그 표현이 가장 정확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을 적확한 시점에만 써야 한다는 거죠.


아무리 좋은 표현도 성의 없이 여기저기 갖다 붙이는 순간 그 의미를 잃습니다. 아끼고 아꼈다가 참말이지 이때 이 표현이 아니면 안 된다 싶을 때에 딱 꺼내어 썼을 때 비로소 그 진면모가 드러나죠. 그렇기에 말을 할 때든, 글을 쓸 때든 반사적으로 내뱉고 있지는 않나 잠시 생각해봅니다.


언어라는 세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말처럼 언어는 사람이 세계를 보는 방식, 즉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위에서 발췌한 신형철 님의 글 '봄날의 새끼 곰과 정말이지 굉장한 것'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한계를 깨부수고 넘어서는 건,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부해야만 가능하겠지요. 그렇게 살아보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그렇게 살아보아야 하는 건 아닐지. 이쯤이면 되었다고 벌써부터 만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또 글을 쓰고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배웠습니다.


여담이지만 굳이 비트겐슈타인을 언급한 건, 이 말이 새로울 것이 없음에도 어떠한 사상적 기반에 기대고 있음을 밝히는 게 낫겠다 싶었던 마음이 절반, 조금이나마 엄밀한 글쓰기를 해보고 싶었던 욕심 반입니다. 그의 저작 <논리철학논고>에 이 말이 나와있다는데,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런 맥락에 써도 되는지 실제로 그런 말을 하기는 했는지 염려가 됩니다. 찾아보기는 했어도 께름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군요.



끝으로

사실 이렇게 끝내기에는 너무나 아쉽고 이 책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도 참 많습니다. 각 장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혹은 이렇게도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주석을 달아가며 글을 쓰고 싶지만 그래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습니다. 오히려 여러분께서 한 번 꼭 읽어보시길 권유드립니다.


책을 읽고도 감상을 남기는 게 한참 걸리곤 했는데, 좋은 책은 어떻게든 꼭 알리고 싶다는 조바심에 서둘러 글을 써버렸습니다. 이미 보실 분들은 보셨겠지만, 더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책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읽는 게 더 좋은 법이니까요.


아참, 제목을 '내가 책을 읽는 이유'라고 했지만 정작 그 이유는 초반에만 이야기했군요.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 마디 덧붙인다면, 단순히 재미있어서라는 상투적인 답변보다는 좋은 책을 읽었을 때 비로소 삶에 실감이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음번에는 좀 더 좋은 대답을 들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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