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을 읽고
지난 9월 1일에 쓴 글 <내가 책을 읽는 이유 (1)>에 숫자가 들어간 이유를 밝히며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만 하더라도 2권의 책을 묶어서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막상 쓰기 시작하고 보니 분량이 예상보다 훨씬 늘어나더군요. 이대로 썼다가는 너무 길어지겠다 싶어서 부득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번 글에서 다룰 책과 지난 서평에서 다룬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딱히 공통점이랄 게 없습니다. 굳이 한데 묶는다면 두 권의 책 모두 산문집이라는 정도? 두 책의 저자 모두 예리한 지성과 비판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겠습니다만, 그런 특징으로 함께 묶어내기엔 어딘가 억지스럽습니다.
2권의 책을 따로따로 소개하게 된 건 차라리 잘 된 일입니다. 실컷 변죽을 올렸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책 소개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우치다 다쓰루의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입니다.
책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은 말 그대로 저자 '우치다 다쓰루'가 어떻게 세상을 읽어내고 있는지를 다루는 책입니다. 여기서 '읽는다'는 행위의 대상으로 '세상'을 지칭한 까닭은 우치다 다쓰루의 읽기가 개별 대상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책도 읽고, 세상도 읽고, 많은 것에서부터 '읽어내고' 있습니다.
책은 6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문학과 철학 그리고 교육학, 저작권과 기초 교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편의상 학문에 따라 분류하기는 했으나, 각각의 이야기에 흐르는 사상적 지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치열함이 있다고나 할까요.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치다 다쓰루의 주장은 어쩌면 참으로 '꼰대스러운' 발언이기도 합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우치다 다쓰루는 모른다고 무시하거나 훈계하고, 깔보는 게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진지하게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제대로 된 꼰대'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우치다 다쓰루라는 사람을 <하류 지향>이라는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대체 이 책을 어떤 경로로 읽게 되었는지는 이제 와서는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어렵사리 추측해본다면, 아마도 2011년쯤이었나 2012년 때였나 <88만 원 세대>를 비롯해 세대론에 관해 알아보다가 읽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이른바 '인문학', '청년 세대'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청년 세대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오고 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여러 주장이 있었지만, 아주 거칠게 두 부류로 나누면 20대가 문제라는 쪽과 지금 사회의 문제를 20대에게 따지는 사고방식이 문제적이라는 쪽이 있었지요.
그렇기에 어느 한쪽에서는 20대를 비난하기에 급급했고, 또 다른 쪽에서는 20대를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날 선 목소리를 내곤 했던 것 같습니다. '같다'는 표현을 유난히 자주 쓰게 되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저로서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었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이 20대이므로, 20대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20대가 처한 많은 문제들의 원인을 무작정 외부로 돌리는 것도 마뜩지 않고, 대체 무엇이 옳은 건지 고민만 깊어져 갔습니다. 그러다 나의 현실에서 잠깐 거리를 두고,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다른 사회에 대한 책을 읽게 된 거죠.
바로 우치다 다쓰루의 <하류지향>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당시에는 10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한국이 일본의 뒤를 따라간다는 식으로 두 나라의 간극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우치다 다쓰루의 <하류지향>도 동일 선상에서 읽을 수 있고요.
다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우치다 다쓰루는 20대에게 짱돌과 바리케이드를 치라고 주문하는 게 아니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의 근본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 인식은 같지만, 그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할까요. 너무 오래전에 읽어 확신에 차서 말할 수는 없지만.
우치다 다쓰루가 <하류 지향>을 통하여 '지금의 20대가 문제적이다.'는 주장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20대가 처한, 아니, 사회 전체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책임과 그 방법을 전적으로 20대에게 위임하지도 않았고요. 거기에서 '우치다 다쓰루'라는 사람만의 독특한 지점이 형성됩니다.
그는 지금 당장, 특정한 일이나 사태에 대한 아주 지엽적이고 전문적인 이야기보다 자신이 읽어내는 세상과 살아가기 위한 방식을 이야기합니다. 고작 해야 이걸 말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돌아오는 수고를 치렀네요. 책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도 그 연장선에 있거든요.
우치다 다쓰루가 책에서 다루는 다양한 주장 각각만 놓고 이야기하더라도 한 편의 글이 나오겠지만, 부득이 책 소개를 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 흥미로웠던 점만을 뽑아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나 그의 주장과 함께 놓고 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우치다 다쓰루의 주장 중에서도 '독자를 우습게 보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사키 아타루도 비슷한 주장을 했으니까요. 이들 -사상가라고 해야 할지, 철학자라고 해야 할지, 여하튼 지식인들- 이 비슷한 주장을 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겁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출판업계의 부진을 걱정하며, 독서율의 저하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특히나 '요즘 독자들은 쉬운 내용을 원한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나, 자기 계발서나 실용서적이 잘 팔리는 현실을 거론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출판업계의 '누군가'는 독자들이 원하니까 그렇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 사사키 아타루도, 우치다 다쓰루도 대체 어떤 독자가 그런 것을 원하고 있냐며, 당신들 멋대로 '독자 일반'을 정해놓고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일갈합니다. 출판업계에 종사하며 독자 운운하는 이들에게서 독자에 대한 조금의 존중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쉽게 쓰인 글, 알기 쉬운 단어로 쓰인 글이라고 해서 반드시 '잘 읽히는 글'이 아닐 수 있다는 우치다 다쓰루의 주장을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글쓰기를 배울 때도, 가급적이면 쉬운 단어를 쓰고 중학생이라도 알 수 있을 법한 말로 쓰라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중학생도 알 수 있을 법하다'는 건 어느 정도일까요? 한참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으로 전국이 떠들썩할 때, 이동진 평론가의 감상평이 구설에 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감상평에 쓰였던 단어 중 '명징'과 '직조' 같이, 잘 쓰지도 않는 어려운 말을 써가며 아는 척을 한다는 게 논란이 되었습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 영화평론가 이동진
문제의 한줄평입니다. 이 단어들이 정말로 어렵냐는 제쳐두고서라도, 처음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만 놓고 보면 어떨까요? 상승과 하강, 그래,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소리겠군. 명징? 아, 뭔가 명확하다는 건가? 직조? 만들었다는 소리? 신랄, 꾸미는 거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거겠지? 처연, 아, 뭔가 쓸쓸하겠군.
계급이나 우화는 신분이나, 이솝 우화에서 알 수 있듯이 무언가를 빗댄 이야기 정도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볼 때 이렇게 의미를 일일이 해석하며 읽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단어가 주는 뉘앙스를 파악하기는 합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저런 단어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건 그 단어들이 가장 적절한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혹은 한줄평이라는 것 자체가 지닌 한계였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간 여기서에서도 중요한 건 글을 잘 읽히도록 쓴다는 것이 반드시 쉬운 표현을 쓴다는 말과 같을 순 없다는 점입니다.
우치다 다쓰루 그 자신은 최대한 '읽기 쉬운 글'을 쓰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읽기 쉬운 단어'를 쓰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밝힙니다. 문맥에 따라 충분히 그 의미를 알 수 있으면, 설령 어려운 단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전혀 없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점에서 수십 수백 년을 살아남은 스테디셀러의 조건을 거론합니다.
지금 시대에만 통용되는 지식으로 이해되는 글을 써서야, 길고 긴 시간의 압력에 짓눌려 끝끝내 사라지는 글이 되고 말 겁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가 살아있는 한 언제라도 읽힐 수 있는 글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글은 설령 어렵더라도 기어코 읽힙니다.
우치다 다쓰루는 이를 '몸으로 읽는 감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느낌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말 그대로 대략적으로 느낌만 알 것 같지만, 어떤 글들은 몹시 생소한 단어로 쓰였더라도 그 의미가 와 닿기도 합니다. 우치다 다쓰루는 자신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고 이야기하죠.
우치다 다쓰루의 글에서 돋보이는 또 다른 점은 그의 시원시원함입니다. 그건 우치다 다쓰루 개인의 성격이 지닌 시원시원함일 수도 있고, 혹은 '지식을 대하는 태도'로서의 시원시원함이기도 합니다. 우치다 다쓰루는 자신의 글이 누군가에 의해 다시 사용되더라도 괜찮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는 그 글을 이용하여 수익을 내더라도 괜찮다(!)는 입장인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글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우치다 다쓰루 스스로도 자신이 교수와 저자를 겸하고 있고 재정적인 압박이 없으므로 가능한 주장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이 주장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치다 다쓰루는 순전한 개인의 욕망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글을 보이고 싶다'는 것과, '지식은 가급적 널리 공유되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저작권에 대하여 지닌 입장을 읽어보셔도 좋을 겁니다.
이쯤 되니 정말로 글을 나누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정신없는 글을 서평이랍시고 내보여도 좋은 건지 잠깐 망설여집니다. 과연 모바일 환경에서 이 글을 끝까지 읽어낼 분들이 얼마나 될지 벌써부터 염려가 앞섭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끝까지 써 내려갑니다.
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좋은 책은 읽고 나면 사람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 변화의 폭이 너무 작아서 당장에 확인할 수 없더라도,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고 난 후의 내가 같을 수 없습니다. 물론 나쁜 책도 일부 바꾸어 놓기는 하지만 좋은 책은 인생 전반에 걸쳐 서서히 아주 틀림없이 바꾸어놓는다는 차이가 있죠.
바뀌는 것은 세상을 보는 방식일 수도 있고, 나라는 사람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우치다 다쓰루라는 사람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스스로도 우치다 다쓰루가 잠시 되었다가 나라면 이제 어떻게 세상을 봐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좋아서, 저는 책을 읽습니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국에는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우치다 다쓰루 선생의 말이 정답은 아니지만, 그의 관점에서 바라보다 보면 정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게 좋은지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짧아서 틈틈이 읽기도 좋다는 부차적인 장점도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