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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늘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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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Oct 01. 2020

텅 빈 하루를 보내며

[오늘한편] 명절

언제부터였더라. 더 이상 명절이 설레지 않게 되었던 게. 초등학생일 때만 하더라도 명절은 즐거운 이벤트였다. 밤늦게까지 합법적으로 TV를 볼 수 있었고, 명절 특선 영화 중 무엇을 봐야 할지 고민하는 일조차도 설레었다. 평소와는 다른 색다른 일들로 꾸려진 하루하루. 연휴가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 대로 좋았다


잠깐, 정말 그랬을까?


막상 써놓고 보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때 당시의 내가 어떤 기분으로 명절을 보냈는지 지금의 내가 알 도리는 없지 않은가. 일기를 뒤적여볼 필요까지도 없다. 아마 즐겁기는 커녕 귀찮고 따분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명절을 앞두고 가슴 두근거렸을 거라는 건 단순히 내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 비교적 최근까지는 어땠을까.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는 백수였고, 매일매일이 휴일이고 연휴였다. 그 와중에 합법적으로 쉴 수 있다는 건 남 눈치를 더 볼 필요가 없으니 물론 좋은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 말고 남들도 다 노는 날이 뭐 대단할 게 있겠는가. 어차피 놀고 있었고 또 계속 놀 건데, 휴일이라고 굳이 더 신나야할 이유도 없다.


괜한 죄책감과 손해를 본 듯한 느낌만 있을 뿐이지. 학생일 때도 마찬가지다. 학기 중이라면 귀성 기차표를 예매하는 곤란함이 더해지는 정도. 평소에 연락도 없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을 때의 그 난감함이란. 네, 잘 지내죠. 성적이요? 아, 뭐. 하하.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직장인으로 맞이하는 명절도 다를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5일의 연휴도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이틀이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분이다. 추석을 앞두고 있을 때만 해도, 오래간만에 맞이한 긴 휴일이라 꽤 흥분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거울 것만 같은 느낌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휴일을 맞이한 첫날부터 무덤덤했다.


따지고 보면 웃긴 게 뭘 계획하지도 않았는데 특별한 있을 턱이 있나. 연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세상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 있을 이유도 없고. 그 정체불명의 기대감은 어디에서 왔던 걸까. 시시각각 내 손을 빠져나가는 시간을 보고 있자니, 기분만 미묘하다. 대체 뭘까, 이 미적지근함의 정체는.


문득 명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두근거린 게 언제였는지 궁금해졌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알고 보니 엄청나게 이벤트를 고대하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뭐라도 신나는 일이 있기를 바란 건 아닌지. 멍하니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자면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인생은 뭘까. 휴일은 뭘까. 나는 대체 뭘까.


참으로 오래간만에 계획도 의무도 없는 텅 빈 시간을 마주하고 있다 아마도 당분간은 다시 없을 것 같은 이 순간. 비어있는 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할지 답을 내리지 못해 그저 비워둔 채로 보내려니 너무 속상하고 또 아쉬웠던 게 아닌지. 그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하루하루가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었다.


회사일로, 운동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종류의 행동들을 덧대고 또 덧대고.


오늘 갑자기 무엇도 할 필요 없는 하얀 백지를 바라보니 그만 말문이 막힌 셈이다. 그렇군. 삶이란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이군. 아무 것도 없어보이지만 감당하기에는 한없이 무거운 그 질량에 짓눌려서,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또 하루가 지나갔다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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