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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Oct 20. 2020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면

영화 <소리도 없이>

들어가며

영화관을 다녀온 게 벌써 3개월도 전입니다. 6월 29일 날 영화 <#살아있다>를 보고 리뷰를 남겼지요. 그 후 다시금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며,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발길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영화관도 갈 수 없었구요. 그러다가 며칠 전인 10월 17일 날 참으로 오래간만에 바깥나들이를 했습니다.


모처럼 밖에 나오기도 했고 할인 티켓도 있겠다, 영화를 보게 되었지요. 3개월 전과 지금, 꽤나 긴 시간을 두고 하필이면 주연배우가 똑같은 영화를 보게 될 줄이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셈이지만 우연치고는 참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다룰 영화 <소리도 없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영화 모두 주연배우로 유아인 씨가 등장합니다. (영화 <소리도 없이>,  <#살아있다>)


영화에서 모종의 이유로 말을 하지 못하는 인물인 '태인' 역을 맡은 유아인 씨는 영화 <#살아있다>에서도 주연 배우 역할을 맡았지요.


그렇다고 똑같은 주연배우가 등장한다는 특징 하나로는 두 영화를 한데 묶을 수 없습니다. 장르가 다르다는 점도 한몫하지만 영화 <소리도 없이>는 뭐라 해야 할까요, 여러모로 특이한 영화거든요.


영화 <소리도 없이> 소개

영화 <소리도 없이>가 상영 중이라는 사실은 극장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사전 정보도 기대도 없었습니다.


그날은 제법 졸린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재미없으면 까닥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았고요. 영화를 보는 중에 잠드는 일이 지금껏 없기는 했지만 보다가 잠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지요.


이게 웬걸, 졸음이 올 듯 말 듯하다가 또렷한 정신으로 끝까지 보았습니다. 이 영화의 무엇이 그리도 매력적이었는지,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주의)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므로 원치 않으신 분들은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엉성해 보여도 나름대로 뒷 세계의 스페셜리스트인 두 사람, 창복과 태인


영화 <소리도 없이>는 우연히 어떤 아이를 유괴하게 된 두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범죄조직을 대신하여 시체의 뒤처리를 도맡아 처리하는 창복(유재명 분)과 태인(유아인 분)은 어느 날, 초희(문승아 분)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죠.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멀쩡하게 살아있던 사람이 피칠갑을 한채 초주검이 되어있어도 눈 하나 끔뻑하지 않던 창복과 태인이라고 해도 아이를 맡는다는 건 곤란한 일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을에 불과한 두 사람은 덜컥 아이를 맡게 됩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잠깐만 아이를 맡아달라고 했던 의뢰인이 그만 죽어버렸거든요.


이제 아이를 부모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상황. 그마저도 녹록지 않습니다. 중개를 맡은 쪽에서 말하길 납치한 아이를 그냥 돌려줄 수는 없다는 겁니다.


결국 두 남자는 본의 아니었지만 유괴에 가담하며 본격적인 범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평범한 악당들

여기까지가 영화 <소리도 없이>의 큰 줄기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범죄영화라고 하기에는 영화의 풍광도, 분위기도 전혀 범죄 영화스럽지 않습니다.


영화의 주연인 두 남자는 당당하게 시체를 유기하고, 처음에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아이를 납치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인물들의 성격이며 태도에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분노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흔하디 흔한 '먹고사니즘'의 지난함입니다.


공손한 창복의 두 손은 을의 외적인 태도를, 불만 가득한 태인의 표정은 을의 속내를 대변합니다.


윗사람에게는 찍소리 못하고, 그러는 주제에 자기보다 만만한 아랫사람을 있는 대로 부려먹으며 이게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라며 생색을 내는 창복.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가슴속에 감정을 꾹꾹 눌러둔 채로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하는 태인.


회사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여기서 이렇게 반복되다니.


이 두 사람이 우리와 다른 점은 하나입니다. 아주 태연하게 나쁜 짓을 하며 먹고 산다는 것. 낮에는 계란을 팔며 평범한 사람들처럼 지내는 것처럼 보여도 본업은 '시체유기'입니다.


이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도 사람을 죽이고, 아이들을 납치하고, 그렇게 유괴한 아이들을 어딘가로 내다 팔지만 너무나 평범하게 그려집니다.


이 평범한 악당들의 모습과, 영화 속의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만들어내는 불일치는 괜스레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불일치 중에서도 단연 초희와 태인, 두 사람의 관계야말로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피안에 있는 것은

영화는 선과 악이라는 고루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떤 종류의 불가해함을 다루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소 극단적인 상황 설계가 필요했나 봅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말을 하지 못하는 태인이나, 어린 나이임에도 굉장히 똑똑하며 영악하기까지 한 초희라는 인물이 그러한 영화적 구성의 예시입니다.



초희는 불과 11살이지만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떻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물론 11살이면 초등학교 고학년이니 제법 성숙할 수도 있겠지만, 초희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이렇게까지 영민할 수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아니, 아주 영악하죠.


틈만 나면 적극적으로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그러면서도 순종적으로 행동합니다. 오히려 유괴된 상황에서 제법 여유를 가지며 즐기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요.



초희의 행동이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진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태인은 아주 투명한 인물입니다. 태인은 얼떨결에 초희를 맡게 된 게 너무나 불편하고, 한시라도 빨리 돌려보내고 싶어 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초희가 핏자국을 보지 못하게 지우려고 한다거나, 홀대하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초희가 동생을 돌봐주는 데다 척척 방청소와 빨래까지 해내니 좋게 좋게 여기기도 하죠.


이 두 사람의 복잡 미묘한 관계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극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 영화의 진면모가 있습니다.


불가해의 영역

어쨌거나 저쨌거나 초희는 유괴된 상태고 유괴범인 태인과 창복은 초희의 몸값을 받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무사히 돈을 받아내며 끝나는 가 싶더니, 영화는 의외의 전개로 치닫습니다.


돈을 받으러 갔던 창복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고 만 겁니다.


연락을 주겠다던 창복에게서 전화가 없자, 태인은 초희를 수상한 부부에게 넘기고 말죠. 그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초희를 그들로부터 구해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초희를 구해낸 이후로도 범상치 않은 사건들 끝에 태인은 초희를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초희가 다니던 학교에 무사히 도착해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 영화는 또 한 번 예상치도 못한 전개로 나아가죠.


태인이 누구냐고 물어오는 선생님의 질문에 초희는 '유괴범'이라는 뉘앙스로 답한 거죠.



그야 원론적으로 따지면야 태인은 유괴범이 맞긴 하는데. 이게 거기서 나올 말인가 싶습니다. 그 상황에서 태인 못지않게 관객도 당황스럽습니다.


초희의 말을 들은 선생님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태인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곤 쏜살 같이 그 자리를 벗어납니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부득이 많은 부분을 생략하였으나, 요지는 이렇습니다. 태인과 초희는 사건을 겪어나가며 나름대로 신뢰를 구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그 신뢰는 산산조각이 나죠.


이쯤 되면 '영화가 대체 이게 뭐냐'라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나지는 않는 데다가 찜찜한 기분만 남습니다. 그리고 그 찜찜한 기분은 다분히 영화가 의도한 결과라는 게 더욱 큰 찜찜함을 만들어 냅니다.


삶이란 이런 것이다

태인과 초희,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역설적인지 드러냅니다. 영화에서 악인은 생각보다 '악인'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범죄라고 불릴 수 있는 '나쁜 일'은 아주 평범하게 일어나니까요.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미묘한 상호작용을 거치며 끈끈하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쉽게 끊어지기도 하지요.


특히 태인와 초희의 관계에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도무지 두 사람의 의중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한 기분마저 듭니다.


그런 의혹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바로 태인의 '말을 하지 못한다'는 특징입니다. 영화에서는 태인이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럴 필요도 없었을 테고, 태인이 말을 했더라면 시시했을지도 모릅니다.


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초희'라는 인물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그리고 영화의 상황과 메시지가 더욱 부각되죠. 그야말로 '소리도 없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더할나위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고요 속의 외침

옛날 TV 프로그램 중 가족 오락관에 '고요 속의 외침'이란 코너가 있었습니다. 앞사람이 한 말을 듣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었죠.


문제는 참여자 모두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헤드폰을 쓰고 있다 보니, 차례를 거듭할수록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되곤 하는 게 웃음을 유발하던 코너였습니다.


영화 <소리도 없이>는 정반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리'가 부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오해와 그걸 바로잡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노력들이 허사가 되고야 마는, 어떤 허탈함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 허탈함에 이르는 과정은 우리의 인생과 아주 많이 닮아있고요.


영화의 무책임함에 화가 난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다는 의견에 저 역시도 공감이 갑니다.


영화가 이런 식으로밖에 결말을 내지 못한 것은, 아니, 이렇게 결말을 내야만 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절대 초희는 태인을 두둔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야 이 영화는 <아저씨>의 우스꽝스러운 변주에 불과해집니다. 그렇게 살벌하거나 극적인 이야기가 되어서는 곤란하죠.


그럼 초희가 스톡홀름 신드롬이나, 가해자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연기를 한 걸까요?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도 아닌 것 같습니다.


도저히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삶의 모순이나 역설이 영화 곳곳에 있습니다. 또한 영화가 삶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 너무 무겁거나 가볍지도 않다는 점이 <소리도 없이>의 매력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나면 뭔가 알듯 말듯한 감각에 목이 간질간질하지만 끝끝내 말문이 턱 하고 막히고 마는, 그저 이게 대체 뭐람, 하는 기분에 괜스레 투덜거리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걸 보며 가만히 고민하다가, 만족스러운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극장을 나와야 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딱히 결론이 난 건 없습니다.


영화학이나 비평을 공부한 게 아니다 보니, 글을 쓰는 내내 열심히 헛다리만 짚은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못한 결론을 내린 뒤 성급하게 글을 마무리지은 느낌입니다.


아니, 애초에 영화에 대해 뭣하나 제대로 말하지 못한 느낌입니다.


잊혀지기 전에 감상을 남기고자 서둘러 마무리짓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글을 읽기 전에 영화를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읽고 나서는 감상을 공유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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