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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Jan 02. 2021

일본 영화는 왜 이럴까

<히비키>,<니세코이>,<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빙과>를 보고

2020년 12월 중순, 총 4편의 일본 영화를 보았습니다. 감상평을 바로 쓰고 싶었으나, 만성적인 미루기로 인해서 한 해를 넘긴 지금에서야 부랴부랴 밀린 숙제를 하듯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따로 마감이 정해진 일도 아니지만 더 이상 미뤘다간 마음속의 데드라인을 넘겨버릴 것 같아서 말이죠.


오늘 소개할 4편의 일본 영화는 모두 같은 제목의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의 상영일자 순으로 <빙과(2017)>, <히비키(2018)>, <니세코이(2018)>, <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 ~천재들의 연애 두뇌전~(2019)> 이상 총 4개 작품입니다.


원작을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제목만 보더라도 영화가 어떤 내용이 훤히 그려지실 겁니다. 실제로 영화의 전개 또한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원작을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위 4편의 영화 각각의 줄거리를 요약하여 소개한 다음 본격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소개할 영화가 4편이나 되다 보니 줄거리 요약만으로도 상당히 길어질 것 같군요. 본문에서는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으니, 영화를 볼 의향이 있으신 분들은 반드시 영화를 보고 나서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1. 빙과(2017)

영화 <빙과>의 포스터. 세상 다 귀찮다는 뚱한 표정의 호타로와 뭔가 기대하는 눈빛의 치탄다의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줄거리 요약

스스로를 잿빛 청춘이라는 말로 소개할 만큼, 적극적인 에너지 절약을 삶의 모토로 삼고 있는 인물 오레키 호타로(야마자키 켄토 분)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친누나의 강압에 굴복한 끝에 본인의 의지에 꺾고 고전부에 들어가게 됩니다.


호타로는 허름한 고전부 부실에서 우연히 치탄다 에루(히로세 아리스 분)를 만나게 됩니다. 의도치 않았던 만남으로 인해 에너지 절약이라는 모토는 산산이 조각나고, 신경 쓰이는 일 투성이인 치탄다 에루와 함께 그녀의 외삼촌과 고전부에 얽힌 사연을 파헤치게 됩니다.


감상평

본 작품은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 <빙과>를 원작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헷갈리실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자면 소설 원작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라는 거죠.


영화가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인기몰이에 성공했고, 애니메이션이 상영된 2012년으로부터 무려 5년이 지난 2017년 영화로 다시 한번 제작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무리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했다지만, 이렇게까지 시간차를 두고 제작한 이유는 추측조차 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재현해놓은 수준에 그치고 말았는데 굳이 영화로 만들어야 했을 당위가 무엇이었나 생각하게 되더군요. 아주 못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할 것도 없는 영화였습니다. 흥행에는 실패한 모양이고, 이런 만듦새였다면 그럴만했습니다.


여담

영화를 평가할 때 캐스팅이나, 배우의 연기는 가급적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데 극 중에서 사토시를 보는 순간 내가 아는 애니메이션의 그 인물과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구심이 생기는 통에 사토시가 등장할 때마다 '원작이랑 다를 수 있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내적 갈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2. 히비키(2018)

영화 <히비키>의 포스터. 반항적인 눈빛의 히비키.

줄거리 요약

영화 <히비키>는 일본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소설가, 히비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의 전개는 담백하기 그지없습니다. 비범한 인물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좌우지간 히비키가 일을 벌이고 다른 인물들은 거기에 우왕좌왕하다가 어느새 영화가 끝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라면 비범한 인물을 어떤 방식으로 그려내느냐가 중요하겠죠. 아쿠타카와상과 나오키상을 모두 휩쓴 소설가의 정체가 불과 15살의 여고생이라는 점, 그리고 그 여고생이 범인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것이 핵심에 놓입니다.


문제는 소재는 나름대로 파격적이지만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이 부실하기 그지없습니다. 만화 원작의 영화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못 만든 영화라서 그런 건지 인물을 이해할 단서가 거의 없습니다. 원작을 모르는 분들이 보기에는 히비키는 그저 이상한 녀석에 불과합니다. 이상한 녀석에 대한 이상한 영화가 된 셈이죠.


감상평

이 작품 또한 <빙과>와 마찬가지로 동명의 원작을 바탕에 두고 있으며, 영화의 내용은 만화의 초중반부에 해당합니다. 파격적인 행보로 세간에 충격을 주는 천재 예술가를 다루려는 시도 자체야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화에서 하필 소설가를 다룬다는 시도 자체가 신선했습니다.


작가의 그림실력이 뛰어난 편이 아닌데도, 이상할만치 사실적으로 다가왔던 게 기억납니다. 하지만 원작의 그 느낌은 다분히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에 기댄 것이다 보니, 스크린에 옮겨내기 어려웠을 거라는 게 십분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감아해도 영화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원작에서도 히비키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영화에서도 괴짜에 불과합니다. 도대체 히비키의 소설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주변에서 저렇게까지 대우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죠. 만화에서는 그래도 '만화'라는 이유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들이 영화에서는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게 된 겁니다.


내용을 전달하는 매체가 바뀌면서 생기는 이 간극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은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문제입니다. 단순한 재현에 그치고 말기 때문에 원작과의 괴리감은 유난히 더 부각됩니다.


여담

이 작품에서도 배우의 캐스팅이 조금 놀라웠습니다. 작품에서 핀란드인 혼혈로 등장하는 동아리 선배 역할에 정말 혼혈 배우를 캐스팅했더라고요. 물론 아야카 윌슨은 캐나다인이니 조금 다르긴 합니다만.


3. 니세코이(2019)

영화 <니세코이>의 포스터, 뭔가 인물이 많습니다.

줄거리 요약

유력한 야쿠자 집안의 후계자인 이치조 라쿠(나카지마 켄토 분)와 미국의 갱스터 집단의 후계자 키리사키 치토게(나카죠 아야미)가 두 집안의 평화를 위하여 가짜 연인 행세를 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역시나 이 영화도 동명의 만화인 <니세코이>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라쿠가 어떤 캐릭터와 이어지는지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들었던 원작과는 달리, 영화는 분량상의 문제로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쳐내고 가짜 연인 행세를 하다 보니 결국에는 눈이 맞게 되었더라는, 참 뻔한 내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위장 연애와 더불어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또 다른 설정도 거의 활용되지 못했는데요. 주인공인 라쿠에게는 어린 시절, 결혼을 약속한 소녀가 있으며 자물쇠 모양의 펜던트와 열쇠를 서로 나누어가졌다는 이야기는 슬플 정도로 비중이 적어졌습니다. 아예 뺄 수는 없으니 일단 넣고만 본 거죠.



감상평

정리하자면 원작이 워낙에 잘 나갔으니, 그 인기에 편승해서 실사영화까지 제작된 것 같은데 원작 하고는 좀 거리가 멀어진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원작 팬들이 보기에는 그런대로 재미 삼아 볼 수 있는 정도의 완성도는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사영화의 목적이 원작의 재현에 있다면, 배우의 캐스팅부터 연출과 편집까지 원작과 최대한 흡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갑니다. 그럼에도 분량의 문제로 원작의 내용을 다 쳐내고 메인 플롯만 남기면, 원작 재현도 제대로 못한 거 아닌가 싶어 의구심이 들기는 합니다.



여러모로 실사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이 미묘한 완성도는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떤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원작 팬? 아니면 원작을 모르는 영화 관객? 아마도 그 둘 다 아닐 것 같고 그저 시장의 논리가 유일한 정답이 아닐까 싶어 씁쓸해지기는 하는군요.



여담

<니세코이>에서도 키리사키 치토게 역을 맡은 배우 분이 혼혈인 게 눈에 띄더군요. 의외로 이런 곳에서는 원작과의 정합성을 신경 쓰는 티가 나서 신기하단 말이죠.


4. 카구야 님은 고백받고 싶어(2019)

줄거리 요약

역사와 전통으로 이름 높은 슈치인 고등학교, 그곳의 학생회를 이끄는 회장 시로가네 미유키(히라노 쇼 분)와 부회장 시노미야 카구야(하시모토 칸나분)는 학생회 활동을 통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누가 먼저 고백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수의 인재가 모였다는 슈치인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선 두 사람이 상대방의 입에서 먼저 고백이 나오게끔 치열한 두뇌전을 벌인다는 게 영화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 영화 또한 원작의 내용과 설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호감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나 자질구레한 부분은 모조리 날려버렸죠.


분량상의 문제도 있거니와, 옴니버스 형태로 진행되는 원작의 진행방식을 그대로 따라가기에는 연출에도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부득이 큰 줄기만 가져가고, 에피소드 자체도 원작에서 굵직굵직한 사건 위주로 재편성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완성도가 조악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감상평

앞서 다루었던 3편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원작을 재현해놓는데 급급합니다. 원작 만화에서는 극의 긴장감을 위해 개그와 진지한 심리전을 적절하게 섞어놓았는데, 영화는 그 두 가지 중 코미디만 취하고 그마저도 제대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배우들의 연기는 또 어찌나 만화스럽게 하려고 노력했던지.


특히나 시노미야 카구야를 연기한 배우 하시모토 칸나 분은 여러 실사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면서 배우의 이름값을 지나치게 소모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가 될 정도더군요. 이번 영화도 그렇지만 만화 <은혼>의 실사영화는 물론, <암살교실>에 아직 국내에서 서비스되지 않는 영화들까지...


배우의 연기와 별개로 보다 보니 너무 비슷비슷해서 이제는 어디에 어떤 인물로 나오더라도 다 똑같은 인물처럼 느껴집니다. 영화에 몰입할 수 없다고나 해야 할까요. 이건 단순히 배우의 연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영화의 만듦새가 조악해서 배우가 영화에 녹아들지 않는다는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담

종종 일본 드라마를 보다보면 이 아저씨는 어디에든 등장한다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아저씨가 여기서도 등장하더군요. 바로 사토 지로 씨인데요. 이 아저씨의 존재감이 너무 강해서 어디에 등장해도 영화와 따로 논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어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등장하는 걸까 좀 궁금해지긴 했습니다.


일본 영화는 왜 이렇게 됐나

지금까지 4편의 영화들을 소개하면서 시종일관 만듦새에 문제가 있다는 투로 이야기를 끌고 왔습니다. 이 문제를 일본 영화 전체로 끌고 가자니 그에 대한 지식도 미천하고, 역량도 부족해 어려움이 있겠으나 수박 겉핥기로나마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일본 영화가 모두 만화 원작의 영화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좋은 영화들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는 한국 영화와 일본 영화를 견주는 게 민망할 정도로 일본 영화가 대단했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만 해도 시네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본 영화의 대단했던 시절에 대해서는 풍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을 정도니. 그렇게 대단했던 일본 영화가 지금의 모습이 되어버린 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일본 영화 산업의 구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글 최하단에 소개할 두 편의 기사로 갈음하고자 합니다. 글쓴이 된 도리라면, 독자가 다른 글을 찾아보지 않아도 문제가 없게끔 제대로 설명해야겠으나, 부족한 지식으로 아는 척을 하기보다는 다른 글을 소개하는 게 낫다고 보았습니다.


재현을 위한 재현

사실 이 부분을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글을 쓰려고 해도 영 진도를 내지 못해서 한참동안 지지부진했습니다. 영화 산업의 문제는 영화 자체에도 있지만, 영화 외부, 그 중에서도 특히 시장의 논리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산업 전반에 대한 문제점을 차치하고 영화의 만듦새를 논하는 건 무의미한 지적에 그칩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건 제작자를 다그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외부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죠.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일본영화가 이렇게 되고만 문제를 '재현한다'는 명제에서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이 긴 글을 단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결국, '재현을 위한 재현은 퇴보로 귀결된다'일 것입니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의 공통된 문제는 그 목적이 정말로 '재현'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술을 현실에 대한 재현으로 보기도 하고, 재현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현실의 재현을 예술의 본령으로 보았던 사상도 있으니 말입니다. 핍진성이니 리얼리즘이니 하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이때에도 재현 자체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재현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재현입니까?


발전 없는 재현

실사영화에서 재현이란 '안정성의 담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태여 실패할 가능성이 다분한 각본으로 위험한 도박을 할 필요도 없고, 원작 팬들을 상대로 하니 안정적으로 관객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남은 문제는 원작을 얼마나 잘 재현하느냐 뿐이죠. 


그렇게 재현해낸 영화의 만듦새가 조악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겁니다. 재현을 위한 수단으로서 영화가 선택된 것이고 표현 수단 간의 차이가 고려되었을리 만무하니까요. 애초에 표현수단의 차이가 중요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얼마나 원작에 충실하냐만이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영화가 영화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영화로 만들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돈이 된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영화에서밖에 하지 못하는 표현이나 연출, 영화라는 표현방식을 이용하여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느냐, 그것이 거창한 주제의식이나 메시지가 아니어도 좋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굳이 영화를 봐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현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관객에게 외면을 받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굳이 원작보다 더 조악한 가품을 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런 영화가 계속 만들어지는 건 여전히 안정성의 논리가 있기 때문이겠죠.


끝으로

이렇게 날선 비판을 내놓고 할 소리는 아닙니다만, 저는 일본 영화, 특히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실사 영화를 찾아보는 걸 꽤 좋아합니다.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볼때마다 왜 이런 걸 만들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됩니다. 제작자들도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욕망이 있을텐데, 그런 것이 하나도 읽혀지지 않는다니. 이건 너무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서 논하려면 잠깐 알아본 정도로는 부족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일부러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가급적 작품에 대해서 다루었으나, 언제까지고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나 영화에서 이렇다할 내용이 없으면 더 할 말이 없죠. 앞으로도 실사 영화들을 찾아보기야 하겠지만, 아마 글을 써가면서까지 일부러 다루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일본 영화에 대해 좀 더 많은 걸 알게 된 다음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해보고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정말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생긴다면 그때는 또 모르겠군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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