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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Feb 16. 2021

좋은 글은 삶에 깃든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고

나와 국어국문학

대학교 시절, 나의 전공은 국어국문학이었다. 하지만 국어학과 국문학 둘 다 별다른 뜻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거나 글 쓰는 일을 좋아하기는 했어도, 업으로 삼을 정도로 좋아하진 않았다. 그저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어 점수에 맞춰 진학한 셈이니, 전공은 국어국문학이 아니더라도 딱히 상관없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한국 문학에는 관심이 통 생기지 않았다. 혹 가다 한국 문학에 대한 글을 쓸 일이 있을 때면 난감함을 감출 수가 없는데,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지만 '한국 문학'이나 '문학' 두 가지 다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예 모른다고 말하는 건 과장이 지나치겠으나, 뭘 안다고 말하기에도 무리인 수준이다. 


여하간 대학교를 다닐 때도 사정은 비슷해서, 한국문학에 관한 수업을 들으면 생소한 작품들 투성이었다. 그렇게 처음 마주한 작품들 중에서도 보석 같은 글들을 읽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중 유난히 기억나는 작품이 하나 있다.


소설가 박완서에 대한 기억

바로 소설가 박완서의 연작소설 <엄마의 말뚝>이다. 5년 전에 읽었음에도 그 소설을 읽었을 때의 강렬함은 내 안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총 3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모두 좋았지만, 3편 중에서도 단연 인상깊은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2편이었는지 3편이었는지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아서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읽었다고 말하기에도 참 민망한 노릇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하는 건 <엄마의 말뚝>을 계기로 한국어로 쓴 '좋은 이야기'와 '좋은 문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글은 '좋은 것'에 대한 기준을 생각해보게 한다.


좋은 이야기, 좋은 소설

프란츠 카프카는 '책이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좋은 소설은 그것을 읽기 전과 읽고 나서 우리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바꾸어놓아야 한다. <엄마의 말뚝>을 읽고 나서 나는 글을 바라보는 일에 있어서 그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좋은 이야기란 이런 것이구나, 새삼스런 사실을 곱씹어보게 되었다. 글의 짜임새도 그렇지만, 글의 만듦새를 떠나서 <엄마의 말뚝>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은 물론, 말하고 싶었으나 도통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내지 못한 부채감 따위의 응어리진 감정들까지.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를 읽기까지

그 후로 소설가 박완서가 다른 글은 어떨지 궁금함이 생겼다. 꼭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라고 해도 좋았는데, 언제부턴가 소설을 읽는다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워졌기 때문도 있었다. 그래서 대형서점 혹은 동네 헌책방이나 중고서점을 들를 때마다 에세이 쪽을 기웃거리곤 했는데, 어렵지 않게 에세이를 찾을 수 있었다.


이걸 읽어야지 싶어 책을 집어들었다가도 한참을 망설이기 일쑤였다. 소설도 싫증이 난 마당에 굳이 시간을 내서 에세이를 읽어야 하나 그런 고민에 집었다 놓기를 몇번이나 반복했다. 더욱이 에세이를 왜 읽는가하는 회의감이 꽤 오랫동안이나 내 안에 남아있던 탓이었다.


그러다가 한 권 정도 샀던 것도 같은데, 정작 읽지를 않았으니 모르긴 몰라도 거부감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결국 에세이를 읽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최근에 이르러, 표지만 봤을 뿐인데 뭔가에 홀린듯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고


소설가 박완서의 에세이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좋은 글들을 수록했다는 말에 혹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은 게 읽는 내내 참 좋았다. 딱히 더 붙일 말도 없을 정도다. 수록된 에세이를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박완서'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또좋은 글이란 어때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은 삶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묻어있어야 한다. 애써 자신의 치부를 숨기거나 화려하게 꾸미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진솔함이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게 박완서의 글에 있었다.


삶을 내보인다는 것

글을 쓸 때면 내 스스로 항상 자신을 다 내보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존댓말을 써가며 점잖은 척을 하거나, 애써 위악적인 말투로 스스로를 위장한다. 나를 내보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도 도무지 '나'의 모습은 제대로 드러나질 않으니.


누군가 당신의 글은 통 매력이 없다고 꾸짖는다면 거기다 대고 뭐라 변명할 거리도 없다. 나 역시도 억지로 꾸며낸 글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너무 아름다운 문장을 쓰려고 하거나, 현학적인 표현이나 지나친 수사를 마주하고 있으면 눈쌀이 찌푸려진다. 그런 글은 읽힌다는 걸 전제에 두지 않은, 예쁘기만한 '장식' 같다.


그러나 누군가의 글을 두고 그런 말을 쉽게 내뱉을 수도 없다. 제 얼굴에 침 뱉기라고, 당장 내가 쓴 글에도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쓸 때면 항상 고민에 잠긴다. 과연 나는 내가 쓴 글을 통해 삶을 온전히 내보이고 있는 걸까. 더욱 진솔하게, 더욱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오직 진실되게 글쓰기

방법은 간단하다. 조금이라도 더 진실되게 쓸 것. 그것을 나의 진심이라고 생각하며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허투루 쓰지 않을 것. 과연 내가 이 문장을 누군가에게 내보일 때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을 수 있을지. 혹여 나중에 보더라도 괜찮을지. 수긍이 가는 글만 쓸 것.


박완서 작가의 글에서는 진실함은 물론이요, 치열한 고민이 엿보인다. 그래서 좋다. 단 한 마디도 꾸며내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문장을 만나는 건 드문 일인데 박완서 작가의 글의 모든 면에서 고스란히 고민의 흔적들이 전달되어, 이 말들이 나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가다듬어졌을지 느껴진다.


또한 작가 자신과 글이 단단히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게 여실히 보인다. 흔히들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이 글쓰기의 주제가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자신의 일상 속에서 그런 것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그렇게 쓰여진 글이 한 인간의 삶은 물론이고 모든 이들이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진리나 가르침으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도 쉽지 않다. 억지스러워지기 마련이니까.


끝으로

이 글을 마무리짓는 게 어찌나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좋은 글에 걸맞는 좋은 서평을 쓰고 싶은 욕심만 앞섰나보다. 그러나 묵혀두기만 하다가는 영영 글을 끝내지 못할 것 같아서 연휴가 끝난 지금에서야 겨우 마무리 짓고 있다.


서평이라기보다는 감상문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평 운운하는 것에 굉장한 부담감이 드는데, 뭐 다음에 잘써야지 별 수 있나 싶다. 사실 정말 좋은 글에 대해서는 꼭 읽어보라는 말밖에 없다. 우리네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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