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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Oct 19. 2019

'한국영화'라는 장르

[영화 리뷰] <청년경찰(2017)>


들어가기에 앞서

영화 <청년경찰>을 리뷰하기에 앞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여태 리뷰를 써오면서 실컷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글을 시작해놓고 이제와 새삼스럽게 양해를 구하는 건, 당장 꺼낼 이야기가 영화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영화 <청년경찰>은 빌미에 불과할 수도 있겠군요.


한국영화에 대해 리뷰를 쓸 때마다 '한국영화스럽다'는 둥, '한국영화답다'는 둥, '한국적'이라는 둥, 마치 다른 나라의 영화와는 차별되는, 한국영화만의 어떤 특징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는데, 정작 이 말을 쓰고 있는 제가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고 보고 있는지,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나아가 한국영화를 하나의 장르처럼 취급할 수 있는지. 아니, 해도 되는 건지.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얼렁뚱땅 넘어갈 게 아니라 영화 <청년경찰>을 통해 간단하게라도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대체 한국영화만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말입니다.


오늘 다룰 영화, <청년 경찰>입니다.




하필 영화 <청년경찰>에서 한국영화만의 특징을 끌어내는 이유는 본 영화가 2010년 이후 한국에서 제작된 오락영화 내지는 대중영화가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쯤 해서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특정 집단, 계층에 대한 혐오 발언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이 인터넷 커뮤니티만 해도 온갖 이야기가 오고 가는 가운데 다양한 양상의 혐오표현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혐오가 되는 시대에 PC는 질 나쁜 농담처럼 여겨지지만, 고려해야만 합니다.


영화 <청년경찰>은 오락영화라는 전제 아래에 그러한 혐오를 참말이지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딱히 이 영화만의 문제도 아니고 한국영화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 영화에만 국한시켜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 경찰

먼저 경찰부터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영화는 제목부터가 <청년경찰>이니, 경찰이 핵심 소재입니다. 경찰은 영화 속의 모든 소재, 나아가서 테마와도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경찰이라는 집단은 공인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군대와 유사하나, 생활에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흉악 범죄부터, 일상의 대소사까지 경찰의 영향력이 미칩니다. 그래서 경찰은 공적 업무를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민원 처리 공무원으로도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공무 집행 과정에서 무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 과정에는 강제성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강제성이 문제입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간혹 경찰의 오해로 인해 부당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경찰의 권력에 그러한 힘을 실어주는 것은, 이의에도 불구하고 작동해야 하는 상황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국 경찰 정도면 문제없이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밤늦게까지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부터, 범죄의 검거율도 높은 편이죠. 그러나 경찰은 단순히 치안을 지킨다는 것을 넘어섭니다. 공직에 요구되는 것들도 고스란히 넘겨받지요. 정직성, 신실성 따위가 그렇습니다.


최근 경찰에 대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러한 '신실성'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공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제 잇속 챙기기에 바쁘며 국가가 아닌 조직에 충성하고, 내부의 부패를 방치하고 있다는 거지요.


공직자에 대한 현대적 신화

경찰에 대한 혐오는 '불신'에서 연유합니다. 올해 이목을 끌었던 버닝썬 사태를 비롯해,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흉악 범죄에 대한 경찰의 미온적 대응은 곧 경찰 조직이 무능하다는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덧붙여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페미니즘 관련 이슈는 성별에 따른 능력의 문제마저 제기되고 있지요. 


경찰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발생하게 된 배경을 감안하면 문제가 있다는 인식 수준을 넘어서, 경찰이라는 '공인된 무력 집단'이 지닌 역할에 의구심을 갖게 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공권력은 시민의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그 기반이 부실하기 짝이 없으니까요.


영화 <청년경찰>과 경찰 혐오를 이어 붙이는 건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과 이어집니다. 경찰대에 진학을 결심한 두 인물, 박기준(박서준 분)과 강희열(강하늘 분)은 경찰에 대한 고민도 없이 각자의 사정에 따라 남들이 대학에 가듯 결정했을 뿐입니다. 책임감이 없는 이들에게 '시민의 치안'을 맡겨도 되는 걸까요?


아니, 대학이라면서 머리는 왜 밀어요?! (응, 여기 경찰대야.)


현실이라고 딱히 다른 건 없어 보입니다. 경찰공무원에 응시하는 숫자가 해마다 늘어나는 바탕에는 사회에 헌신하고 싶다거나 책임감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이유가 깔려있습니다. 비단 최근의 일일까요? 과거라고 다를 것 없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경찰을 하게 됐을 수 있지요.


책임감을 가진 경찰이라는 건 그저 현대적인 신화가 아닐까요? 공직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으레 가지게 되는 인식의 연장에 불과한 거죠. 경찰의 열악한 근무조건을 감안하면 무턱대고 그들의 희생과 봉사를 강요할 수만도 없죠. 영화는 그런 맥락에서 '경찰'에 들어간 두 청년의 모습을 실로 천진난만하게 그려냅니다.

 

더욱이 이 두 청년은 어떤 책임감도 없이 경찰에 들어가지만, 자신들이 목격한 범죄 현장에 단독으로 맞서 싸우기까지 합니다. 경찰은 오히려 이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고, 그저 방기하는 것처럼 묘사되지요. 가출 청소년의 납치 사건보다도 청장 님의 손자가 실종된 사건이 더 급하다는 겁니다.


경찰이기 이전에 법규를 준수하는 한 명의 시민.


현실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경찰의 무관심으로 미연에 방지되었을 수 있는 흉악범죄가 일어난 경우도 있죠. 위기에 처했는데 믿을 수가 없는 '경찰'이라니. 그렇다고 모든 경찰이 손가락만 빨고 있는 건 아닙니다. 경찰도 그렇고 관료 조직은 무능한 듯 보여도 그 나름의 논리로 바쁘게 돌아가니까요.


그 '나름의 논리'가 또 문제가 됩니다. 대체 경찰이 경찰로서 존재하는 이유보다도 더 중요한 논리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요. 인간 사회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아이러니입니다만, 우리가 경찰에 대해 유독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그들이 '공직자'이기 때문입니다. 


시민 사회의 신뢰와 함께 해야 할 경찰에 대한 불신의 문제. 아마도 경찰 조직 내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을 겁니다. 조직의 존폐가 달려있는 문제이니까요. 영화 <청년 경찰>은 그런 복잡한 현실을 아래에 두고 여러 층위에서 다루어보아야 할 듯합니다.


이어서 청년.

경찰로부터 바통을 넘겨받는 건 '청년'입니다. 영화의 주연은 경찰대에 입학한 두 청년, 기준희열입니다. 이들은 집안 사정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경찰대에 입학한 이유도 다르지만, 체력 시험을 거치며 의기투합하게 되었고 대학 생활 도중 눈앞에서 벌어진 실종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한데 뭉칩니다.


이 두 사람이 보여주는 초인적인 수준의 정의감은 극 중에서 경찰대 교수인 양 교수(성동일 분)의 말처럼 '요즘 애들 같지 않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가다가 한 번 봤을 뿐인,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뛰어들다니. 요즘 애들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껴지는데요?


그럼 '옛날 애들'은 두 팔을 다 걷어붙이고 그런 상황에 뛰어들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그 옛날 애들이 만든 게 지금의 여기 아닌가요? 이 말을 듣고 있는 '요즘 애들'인 저는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에 잠깁니다. 정말 이게 '요즘 애들'의 문제인가요?


그래도 나름 괜찮은 어른으로 묘사되기는 합니다.


자신의 안위를 제쳐두고 남을 도왔다가 도리어 낭패를 봤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물론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훌륭한 일이며 마땅히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신념'의 문제이지 의무나 강요될 사항은 아닙니다.


또한 그와 별개로 공익과 사익 중 무엇이 더 나에게 이득이 될 것인지를 저울질해야만 하는 시대의 분위기를 감안해야 합니다. 만약 청년 세대가 정말로 '이기적'이라면, 그렇게 행동하게 된 배경에는 자신들이 보고 배운 게 있기 때문 아닐까요?


꼰대와 청년.

그런 시대를 만들어낸 당사자-어른의 입에서 '요즘 애들'의 속성이 어쩌니 하는 속 편한 소리가 나오면 속이 뒤집힙니다. 청년의 입장에서는 청년의 문제가 이런 식으로 소비되길 원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 두 사람의 대표성도 문제입니다.


배경이 다르다곤 하지만 경찰대에 들어갈 정도의 인물이 어떻게 청년 전체를 대표할 수 있을까요?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청년도 있고, 대학을 가더라도 대학의 층위가 너무 다양하게 나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고려되지 않고 '요즘 것'들로 뭉뚱그려지면 메시지도 불분명해질 수밖에요.


N포 세대라는 말조차도 낡은 표현이 되었습니다. 다만 청년들이 포기하는 사항이 늘면 늘었지 줄지 않는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극 중의 두 인물도 연애나 하고 싶었던 찰나, 사건을 마주합니다. 경찰대에 온 것도 거창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경찰대에 왔고, 그러니 별다른 사명감도 없지요.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정의감이 있습니다. 그런 정의감이 있느냐 없느냐, 한 발짝 더 나아가 발휘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남한테 훌륭한 덕목이니 적극적으로 함양하고 부단히 개발하라는 훈계를 들을 일은 아니라는 거죠. 하물며 오락 영화에서 굳이 그런 잔소리까지 들어야 합니까?


이런 이야기가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지요.


그치지 않는 혐오의 문제.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투명하게 문제를 드러내며 생각할 여지를 제공합니다. 기존의 오락영화에서 등장했던 방식 그대로, <청년경찰>에서도 '조선족'은 악역으로 등장합니다. 심지어 인터넷상의 통념 그대로를 따릅니다.


조선족

이들의 범죄는 가출을 한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난자를 채취하여 불법으로 제공하는 겁니다. 그나마 나은 점이라면 구태여 구구절절한 사연을 소개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조선족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그대로 투영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사건의 배후에서 암약하는 게 조선족이라는 건,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어떠한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편견에 그대로 편승하는 건 게으르다는 지적으로도 모자랍니다. 우리 사회의 편견을 양산하고 있다는 책임감을 느껴야지 않을까요?


앞으로 조선족을 비롯해, 해외 이민자와 다민족 문제는 한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발생할 겁니다. 이미 그에 대한 불만도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구요. 영화가 나서서 그러한 편견을 만들어낸다면, 오락영화라 괜찮다며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구요? 오히려 '그저 영화'에서도 쓰일 만큼 너무나 보편적인 편견이라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조선족과, 이민자 문제는 아주 복잡한 문제라 함부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영화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다루어선 안 된다는 거죠.


여성

곧장 이어지는 것은 여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청년에서 다루었던 문제와도 이어지지만, 독립적인 항목으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 <청년경찰>의 본질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청년을 내세웠다는 건 이들로부터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가 있었다는 거겠죠.


문제는 주연 둘 다 남성이고, 이들은 결코 청년 전체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남성-청년을 대표하지도 못합니다. 물론 이성 듀오의 모습으로 극 중의 전개를 끌어나가려면 또 다른 고민이 필요했을 테니, 또래에 성별까지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로 설정했겠지만, 제작의 편의를 관객이 다 이해해주어야 할 필요도 없죠.


영화의 메인이 되는 사건인 납치,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난자 적출과 대리모 문제는 '여성'과 아주 밀접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아주 자극적인 소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여성의 문제라고 반드시 여성의 눈에서 여성 인물이 해결하는 방식으로 그려져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요.


다만 여성은 피해자로 그려지고, 이를 해결하는 것은 언제나 남성이라는 서사에 불만이 나올 법도 합니다. 거기다 두 사람이 사건을 목격하게 된 계기도, 길을 가다가 예쁜 여성을 보고 말을 붙여보려다 우연에 가깝게 본 것이니....


청소년

다음으로 청소년 문제입니다. 영화는 가출 청소년의 행태까지 접근합니다. 인간은 하루아침에 청년이 되는 게 아니라 청소년기를 거친다는 당연한 사실에 입각하면, 청년의 문제는 곧 청소년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가출 청소년의 문제를 다룬 것은 꽤 의미적입니다.


다만 영화가 청소년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 안전망의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삶은 철저히 영화적 소품으로 쓰입니다. 더욱이 이들의 문제를 대하는 영화의 관점은 시혜적입니다. 영화 내내 드러나는 시혜적인 관점은 여성을 다루는 문제와도 이어집니다.


분량상 청소년 문제까지 전부 다룰 수 없으니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소재지상주의적으로 흘러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청년경찰>이 한국영화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결국 한국영화의 문제

이 모든 키워드를 한데 묶어내는 건 '한국영화'입니다. 한국영화는 종종 놀라울 만큼 시대의 첨예한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하는 듯 보이다가도, 놀라울 만큼 어설프고 편리한 방식으로 이를 다룹니다. 예리함은 관점에만 그칠 뿐, 서사는 빈약하고 다소 게으르기까지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영화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리뷰 내내 쓴소리만 했지만, 비판하는 입장은 너무 '편리'하다는 걸 스스로도 압니다. 영화는 작품이기 이전에 상품이며 산업이고 또 작품이라고 했을 때, 제작 과정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저 길길이 화를 내고 비난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쓴소리를 하는 것은, 제가 한국인이고 한국영화가 저에게는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잘 만들어진 영화라 한들, 그 의식에 담긴 것은 외국인의 관점이고 시선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이 시대와 호흡하는 한국의 영화가 가장 가까울 수밖에요. 그래서 항상 한국영화를 볼 때는 아쉽습니다.


분명 감독과 제작진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 영화를 만들려면 돈이 필요하고, 따라서 영화는 상품일 수밖에 없으며, 팔리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는 걸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나씩 포기한 결과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체념 또한 강해졌습니다.


한국영화가 그럼, 그렇지


물론 현장에서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을 많은 분들의 헌신까지 폄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화 <청년경찰>은 그 흥행과 별개로 청년-여성-경찰-조선족에 대한 기존 한국 사회, 그리고 한국 영화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짜깁기 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드러내는 이 놀라운 한국다움. 저는 그 한국다움에서 한국영화를 보는 이유를 느낍니다. 좋든 싫든 영화는 그 시대와 관객을 비추니까요. 너무 길어졌습니다. 애초에 쓰려고 했던 시점도 올해 중순이었는데, 벌써 10월이 다 되었네요. 이대로 가다간 영영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아 부랴부랴 마무리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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