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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May 10. 2022

신과 인간, 그리고 정의

2022 뮤지컬 <데스노트> 직관 후기 및 감상


작년 어느 날, 우연히 Youtube에서 뮤지컬 <데스노트>의 넘버 중 하나인 '데스노트' 영상을 보게 되었다. 뮤지컬 자체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으나, 영상 속 뮤지컬 배우 홍광호 님의 가창력이 워낙에 출중해서 과장이 아니라 몇십 번은 반복해서 들었다. 그러다가 뭐에 홀린 듯이 '죽음의 게임'이나, '놈의 마음속으로' 같은 데스노트의 또 다른 넘버들도 찾아보게 되었고, 뮤지컬을 직관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데스노트는 2015년 초연, 2017년 재연 이후로 소식이 없는 상태. 언젠가는 상연을 하겠거니 잊고 지내던 중, 마침내 삼연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BcajO6abzY


데스노트의 삼연 소식과 함께 공개된 몇몇 영상들도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다. 여자친구와도 이번 뮤지컬을 보자고 이야기만 하다가, 하루 이틀 미루기만 했는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고민할 것 없이 예매를 마쳤다.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던 '데스노트' 넘버를 부른 홍광호 님과 김준수 님의 무대를 본다면 더 좋았겠으나, 어마어마한 경쟁률의 티켓팅을 뚫을 생각은 언감생심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너무 늦게 예매를 한 탓에 대부분의 좌석이 다 매진된 상태였고, 3층 오른편의 좌석이나마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22년 5월 8일, 마침내 데스노트 뮤지컬을 보게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고은성 님이 연기한 라이토와 김준수 님의 L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고은성 님이 무척 잘하신다는 것은 이미 유튜브 '빵송국'의 '뮤지컬스타'를 통해 확인했고, 특히 김준수 님의 L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5월 8일의 출연진


공연은 7시부터 160분간 진행되었다. 좌석이 3층에서도 상당히 구석에 가까운 위치여서, 배우분들의 얼굴은 거~의 보지 못한다는 게 유일한 흠이었지만 무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대 연출을 잘 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론 이쪽이 좀 더 흥미로웠다. 뮤지컬이 시작하기 전에 무대 전체를 가득 메운 시계와 째각거리는 소리 같은 사소한 연출부터, 장면 장면마다 선과 특수효과를 적극 활용한 무대연출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나 '놈의 마음속으로'에서 라이토와 L의 테니스 경기를 연출한 부분이 압권이었다.



여하간 한 마디로 줄이자면 현장감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고, 배우분들의 노래도 무척 좋았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다. 고은성 님의 라이토도 물론이요, 뮤지컬 직관한 사람들이 샤엘 샤엘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기대한 넘버인 '데스노트'나 '죽음의 게임', '놈의 마음속으로'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라는 것이 뮤지컬 <데스노트>에 대한 대략적인 감상평. 지금부터는 뮤지컬 <데스노트> 라기보다는 주제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번 데스노트를 관람하면서, 만화 <데스노트>를 처음 봤던 순간이 떠올랐다. 2004년, 일본에서 연재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의 소년챔프에서도 연재를 시작했는데 1화를 마주했을 때의 그 충격이란. 그동안 소년챔프에 연재되었던 만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엄청나게 많은 대사와 세련되지만 낯선 그림체-에 놀랐고, 그런데도 무척 재미있어서 2번 놀랐다. 여하간 그때는 그저 '재미'로만 생각했는데, 한편으론 생각할 거리가 꽤 많았다는 걸 이제 와서야 알게 되었다.


데스노트를 관통하는 것은 정의의 문제다. 그리고 이번 데스노트 뮤지컬에서 그 '정의'의 문제를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뮤지컬의 넘버들 중에서도 사신 류크와 렘이 함께 부른 넘버 '불쌍한 인간'과 라이토의 여동생이 부르는 넘버 '나의 히어로', 키라 수사본부의 지휘관이자 라이토의 아버지인 야가미 소이치로와 라이토가 함께 부른 넘버 '선을 넘지마', 이렇게 3가지가 뮤지컬의 무대 연출과 더불어서 주제의식 측면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중에서 '불쌍한 인간'은 비교적 유명한 편인 것 같지만 '나의 히어로'와 '선을 넘지마'는 뮤지컬을 직접 보고 나서야 이런 넘버가 있다는 걸 알았을 정도이니 아마 나와 비슷하게 유튜브에서 데스노트 넘버를 알게 된 분들이라면 모르실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FNAKvNY33w


각각의 넘버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차피 인간의 죽음은 사신에 의해 결정되는데, 삶에 매달리는 인간들이 가엾고 하찮다는 게 '불쌍한 인간들'이라는 넘버를 통해 드러난다. 인생의 무상함을 드러내는 이 같은 허무주의는 절대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도달해서는 안 되는 '신'의 관점이다. '신'의 입장에서 인간세계에서 '정의'가 부재한 것과 부조리한 현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압도적인 무력감을 선사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를 '나의 히어로'와 '선을 넘지마'를 통해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라이토의 동생인 사유가 오빠가 바로 키라라는 것을 모르고, 키라의 방식은 잘못됐다며 오빠 같은 사람과 이야기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며 데스노트를 줍기 이전에 라이토가 보여주었던 올바른 정의를 위해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히어로'라는 표현으로 드러내는 것이 '나의 히어로'라는 넘버다. 사신의 장난에 의해 데스노트라는 너무 막대한 힘을 얻게 되면서, 라이토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무대 연출 역시 라이토가 여동생이 서있는 선이 아니라 또 다른 키라, 미사가 서있는 선을 향해 움직이며 어떻게 바뀌게 되는지 드러낸다.


'선을 넘지마'는 아들 라이토에게 마음속의 신념을 지키라는 소이치와 그에 답하듯이 '신이 되겠다'고 말하는 라이토가 함께 부른 넘버다. 마음속의 선을 넘지 말 것, 그리고 자신 안의 신을 외면하지 말고 스스로 신이 되라는 이야기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정작 라이토는 자신이 신이 되겠다며 스스로의 정의를 정당화하고 만다.


앞의 이 3가지 넘버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메시지는 '정의가 부재한 상화에서 인간은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다.




뮤지컬 <데스노트>에서 세계관에 대한 설정이 원작인 만화에 비해서는 거의 설명되지는 않는 편이나, 최소한 사신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인생의 의미라든지, 인간의 가치라는 것은 사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몇몇 사신들이 전 세계 70억 명 모두의 생살여탈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진 않지만 최소한 누군가의 죽음은 그저 사신들에 의해서 아무런 이유 없이 자행된다고 볼 수 있으리라.


자신의 죽음이 저 하늘의 누군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은 정의나 사랑 같은 것도 무의미하게 보이게끔 만든다. 인간이 죽는 건 특별히 무엇을 더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신이 심심해서니까. 물론 여기엔 하나의 함정이 있는데 사신은 죽음만 결정할 뿐, 삶을 시작하게 만들진 않고, 그 과정을 정하지도 못한다. 그렇기에 삶의 가치를 '죽음'이라는 결과만으로 볼 것이냐도 문제가 된다.


죽으면 끝인가? 일부 사실이다. 인간 개개인은 죽으면 그 자체로 더 이상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으니까 무의미한가? 이 역시도 일부만 사실이다. 죽기 이전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의'라는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뮤지컬 데스노트에서도 말하듯이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선을 제시할 뿐, 무엇이 정의로운지는 개개인의 가치판단의 영역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문제적 상황이다. '정의'란 게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인데, 인간은 이 같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이와 함께 인간 사회에서는 '정의롭지 않은 상황'을 너무나 자주 마주하게 된다. 예를 들어 범죄자가 충분히 처벌받지 않았다거나, 피해자는 고통받는데 가해자는 버젓이 생활한다거나. 불확실한 '정의'와 그 자체로 정의롭지 않아 보이는 상황은 '정의'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한다. 애초에 '정의'는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정의'를 정의할 수 있을까.




이제 '정의'는 '죽음'의 문제와 이어보자. 앞서 이야기했듯 죽음은 결과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라는 결과를 통해 삶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고 '정의' 역시 마찬가지로 '공평하지 않은' 혹은 '부당하게 주어진 결과'를 통해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정의를 만드는 것은 끝나는 법이 없는 수고로운 과정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정의'라는 것은 곧 '정의가 이루어진 상황'이라는 결과로 여기는 실수를 범한다.


안타깝지만 정의가 그 자체로 완벽하게 주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만을 도출해내려고 하다 보면, 라이토와 같은 결론에 이르를 수밖에 없다. 나와 다른 정의를 배제하는 것.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사용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은 의도 자체만은 선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도를 이루는 방법이 데스노트를 통한 살인이었다는 점에서 쉽게 이해받을 수 없고, 그리고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까지 데스노트로 죽였다는 점에서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귀결되고 만다. 여기에는 라이토의 '정의'가 무엇이었는가도 문제가 있다.


라이토의 정의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 같은 인식도 위험하지만, 라이토의 가장 큰 오류는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이들은 '정의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미 라이토는 자신이야말로 '정의'라고 여기고 말았다. 그가 말하듯 자신이 '신세계의 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신'은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나 사실이 그 자체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다. 라이토는 자신이 옳다는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물론 라이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상황을 너무나 자주 겪게 되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라이토처럼 초법적인 권한을 가진 누군가가 벌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런 바람 자체를 두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권한을 일부 가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국가'에 대한 불신도 한몫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법적 권한의 남용이 정의인지는 다른 문제가 아닐까?


우리는 '결과로서의 정의'에만 함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결과로서의 정의'가 훨씬 더 명쾌한 측면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이분법적으로 확실하게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정의'는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세워나가는 과정에 있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정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민을 멈춘 지점에 악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라이토의 대척점에 있는 L이라고 해서 정의롭다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에서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L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죄자를 잡아넣고 있으며, 그 과정을 일종의 '게임'이라고 여기고 있다. 라이토와의 차이점이라면, 그럼에도 '살인과 같이 초법적인 수단을 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한의 기준을 정해놓는다는 것인데 바로 여기, '선을 지킨다'라는 행동원리가 중요하다.


그 선도 몹시 주관적인 기준 아니냐고? 칸트가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이미 그 능력을 지니고 있다. 상대주의에 휩쓸지지 않고, 인간 내면의 능력에 귀를 기울였을 때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라이토의 아버지 야가미 소이치로가 '선을 넘지마'라는 노래에서 이야기했듯이, 혼란스러운 상황일수록 우리 '내면의 신'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지.


철학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적다 보니, 다소 두루뭉술한 결론이 되고 말았는데 좀 더 공부를 해보고 이야기해 보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더 알아가면서 정리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여기서 마치려고 한다. 어째 글을 쓸수록 점점 더 데스노트 뮤지컬에 대한 후기가 아니라 뭔가 종잡을 수 없는 엉뚱한 글이 되었는데 너른 이해를 부탁드린다.


아래에 부족한 부분을 메꿀 수 있을 법한 글들을 찾아보았다.


1. 정의가 무너진 자리에서 어째서 '정의'를 추구해야하는가를 칸트의 관점에서 이해해볼 수 있는 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931345#home


2. 라이토의 정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공리주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글.

https://humanities-oddments.tistory.com/8


3. 영화 데스노트를 통해 어떤 질문들을 더 던져볼 수 있을지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글.

https://webzine.skku.edu/skkuzine/section/knowledge02.do?articleNo=30658&pager.offset=80&pagerLimit=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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