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한편] 도서수집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책을 모으고는 했다.
어렸을 때야, 내가 책을 모은다기보다는 부모님의-주로 어머니 쪽의- 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했다. 어머님 당신이 책을 아주 좋아하셨다기보다는, 책을 읽으면 좋다니까 사주신 것 같았다.
책에 관하여 어머니가 지녔던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는 무언가 읽는 행위 자체를 좋게 보셨다는 점이리라. 흔히 부모가 책을 사준다고 하면 백과사전이나, 세계문학전집 같은 양서만 취급하는 경우가 흔할 것이다. 만화책은 빌려서 읽거나, 당당하게 읽는 것도 어렵고, 모으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경우가 더 흔했던 것 같은데, 어머니는 만화책이나 양산형이라고 불리던 판타지 소설들까지 내가 관심을 보인 책들을 어디선가 알아보시고는 무심하게 사오시곤 했다.
아마도 어머니 나름의 양육방식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이후로 쉬지 않고 일을 해오셨고, 나나 동생을 돌볼 시간이 거의 없으셨다. 뭐라도 하나 해주시고 싶으셨겠지만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으셨을 테니. 적어도 좋아하는 것이라도 -또 책을 읽는다면 그게 나쁜 것도 아니니까- 실컷 하게 해주자는 마음이 아니셨을지. 여하튼 어머니는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고, 나는 그 덕에 자연스럽게 책은 사서 모으는 물건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대학교에 진학하며 서울에 올라와서도 1.5룸짜리 자취방 한쪽 벽이 책장으로 가득 찰 때까지 책을 사 모았다. 사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비하자면 책을 모았다고 말할 수준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정도로 책을 모았다고 자랑을 하기에는 양으로 보나, 의도로 보나 부끄럽기만 할 따름인데, 나는 책을 '사 모으기만'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산 책 중에서 읽은 책은 30%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옷가지나 신발을 사 모으는 행위를 하듯이 책을 모았을 뿐이다. 읽는 것보다 책을 사는 행위를 좋아했던 게 아닐까. 거기서 오는 만족감. 나는 책을 한 가득 사서 집에 돌아가는 걸 좋아했다. 두손에 책이 담긴 봉투의 무게를 느끼면서 힘겹게 걸어가는 순간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모으기만 하면서 또 어떻게 처리할 건지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아서 막상 결혼을 앞두고 이사 갈 때가 되자 처치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책을 모으는 취미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차 한 대도 없으면서 그 많은 책을 옮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왔던 건지. 나는 주말 이틀만 있으면 여자친구와 단 둘이서 책을 옮길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얼마나 대책이 없는 낙관주의였는지. 나의 이 막연한 무계획을 옆에서 지켜본 여자친구는 또 얼마나 기가 찼을까.
다행스럽게도 크로스핏 체육관의 코치님을 비롯해 회원분들이 흔쾌히 시간을 내어 이사를 도와주신 덕분에 무사히 하루만에 책을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 이사 갈 집으로 곧장 입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잠시 책을 밖에 내어놓았는데 그게 문제였다. 책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려웠거니와, 보기에 따라서는 버리려고 내놓은 책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무척 컸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책을 지킬 수도 없었고, 어디 들여놓기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때, 누군가 책을 가져갔던 것 같다. 나는 그것도 모른채 책들이 잘 있을 거라 믿고, 이사갈 새로운 집에서 책을 정리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난주 일요일, 마침내 이사를 끝내고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정리하는데 이게 웬걸, 나는 책을 정리하면 정리할수록 있어야 할 책들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정신없이 이사를 하던 중에야, 책들이 이리저리 흩어져있으니 다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정리하면 할수록 이가 빠진 것처럼 분야별로 하나씩 빠진 책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읽지도 않으면서 꽤나 오랜세월 구독했던 창작과 비평 계간지라든지, 사놓고 결코 읽지 않았던 넛지나 온갖 자기계발서들, 스티븐 핑커의 창작과 양육처럼 꼭 읽어봐야지 싶었던 인문학이나 역사서적들, 꽤나 좋아했던 만화책들과 언젠가 꼭 읽겠다고 생각했던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시민 시리즈, 글쓰기에 관한 책들, 운동에 관하여 나의 지침이 되어주었던 맛스타드림의 남자는 힘이다 등등.
잃어버린 책들이 떠오르자 나는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읽지도 않았지만, 모아두기만 해도 내 마음 한 구석을 든든하게 해주었고 이미 읽었더라도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더 계속 곁에 두려고 했던 나의 책들. 나는 책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밤새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쉬움에 혼자 끙끙거리다가 출근을 위해 겨우겨우 잠을 청했지만, 머릿속은 책으로 그득 차있었다. 누군가 가져간 거라면 지금이라도 좋으니 돌려주면 좋겠다고 간청해 본다거나 혹은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책들이 잘 모여있어서 누군가 찾아서 돌려주진 않을까 망상해보기도 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도 그 책들을 잃어버린 상실감이 너무나 커서 조금이라도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서였다. 글이라도 쓰면 좀 잊혀질까하여.
나는 책을 모으는 걸 참 좋아한다. 그게 얼마나 대책 없는 취미인지도 이사를 통해서 잘 알게 되기도 했지만, 이사를 통해서 책을 모으는 행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사를 할 때야 너무 고됐지만 나는 앞으로도 책을 모으는 걸 좋아할 것이다. 물론 전자책으로 바꾸라는 핀잔을 제법 듣기도 했지만, 도저히 전자책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감각이라는 게 있으니까.
지금만 해도 책이 가져다주는 묘한 만족감을 십분 만끽하고 있다. 이사 온 집의 방 한 칸에, 새로 들여다놓은 책장 한가득 들어차있는 책을 마주보며 글을 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흡족한가. 내 나름대로 분야를 나눠서 정리해둔 책들을 잠시 눈으로 훑기만 해도 괜시리 흐뭇하다. 그러다 또 잃어버린 책들을 떠올리며 못내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짓는다.
어쩌겠는가. 평생 모으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언젠가 버리기는 버려야했을 것이다. 그게 이런 식의 작별은 아니길 바랐지만. 서둘러 배운 셈치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그래도 있을 때 읽어둘걸. 좀 더 열심히 읽어둘 걸.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태풍이 찾아오는 월요일, 나의 잃어버린 책들이 어디서 비를 맞고 있는 건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을 해보며 글을 마무리짓는다.